원주교구 ‘님의 길’, 지난해 10월 개통 그 중 ‘최양업 신부님길’ 121.3㎞ 달해최양업 신부 시복 염원하며 순례 동참
최양업 신부 묘소로 올라가는 초입에 설치돼 있는 최양업 신부 기념 동상.
땀의 증거자, 길 위의 순교자, 한국의 두 번째 사제 가경자 최양업 신부(토마스, 1821~1861). 최양업 신부는 그가 남긴 발자취만큼이나 이름에 수많은 수식어가 뒤따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양업 신부의 영웅적 성덕을 인정하는 교황청 시성부 교령을 승인하며 2016년 가경자로 선포했다. 다음 단계는 시복이지만, 2021년 기적심사가 한 번 계류된 바 있다. 한국 주교단은 곧이어 최양업 신부의 시복을 위해 더 큰 정성과 열정으로 노력하겠다고 약속했고, 지난 3월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시복 시성을 위한 전구 기도 안내 리플릿’을 최종 선정, 전국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의 전 신자는 최양업 신부의 시복을 위한 기도에 동참하고 있으며, 교구 차원에서도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성지와 순례길 조성을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의 시복을 염원하며 지난해 10월 개통한 원주교구 순례길 ‘님의 길’ 중 ‘양업길’을 걸었다.
땀의 증거자, 길 위의 순교자 최양업
‘12’, ‘7000’, ‘127’.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숫자들이다. 최양업 신부는 1849년 수품 후 선종하기까지 12년간 매년 7000리(2800㎞)가 넘는 길을 다니며 127개 교우촌을 순방했다. 박해 시기 전국 각지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일일이 찾아 나선 것이다.
1850년 말 전국의 공소 수는 185개였다. 1851년 최양업 신부의 사목 구역에는 127개의 공소가 있었으니 전국 공소의 70가량을 담당한 셈이다. 그가 만난 신자 수는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3815명이었고 이러한 사목 활동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졌다. 최양업 신부가 ‘땀의 증거자’라 불리는 이유다. 그가 남긴 21통의 서한에서 신자들을 향한 애정과 사목 열정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신자들을 만나지 않을 때는 한문 교리서와 주요 기도서를 우리말로 번역했다. 또 한글로 된 천주 가사를 작성하거나 기존에 있던 가사들을 정리해 신자들에게 보급했다. 성가 형태로 된 천주 가사들이 강론을 대신하기도 했고, 신자들의 신앙심을 돈독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포졸들에게 발각돼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하지만 최양업 신부의 마지막은 그가 쉼 없이 걸었던 길 위에서다. 최양업 신부는 1861년 6월 15일 여느 때처럼 교우촌 순방을 마치고 서울에 있는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다. 하지만 그동안 쉬지 않고 사목한 탓에 과로와 장티푸스로 문경(진천 베티 교우촌)에서 쓰러졌고, 그토록 바라던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의 시신은 같은 해 11월 베르뇌 주교와 신자들에 의해 배론신학교(현 배론성지) 뒷산 언덕에 안장됐다.
최양업 신부의 길을 걷다
원주교구는 지난해 10월 장장 234㎞에 달하는 ‘님의 길’을 개통했다. ‘박해’와 ‘순교’, ‘세상의 빛’을 따라 걷는 3개 노선길, 14개 구간으로 이뤄진 길이다. 1길이 ‘최양업 신부님길’(박해), 2길은 ‘최해성 요한길’(순교), 3길은 ‘정규하 신부님길’(세상의 빛)이다.
이 중 1길인 최양업 신부님길이 121.3㎞로 반 이상을 차지한다. 박해 시대 신자들이 살았던 교우촌과 공소를 이은 길로, 1802년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숨어든 풍수원성당에서 출발해 배론성지에 도착하는 노선이다. 1길은 다시 7개 구간으로 나뉘며, 이중 마지막 구간이 15.1㎞의 ‘양업길’이다.
양업길의 출발지는 화당리 순교자공원이다. 꽃댕이라고도 불린 화당리에는 배론에 살던 신자들이 이주해 1830년대에는 꽤 큰 교우촌을 이뤘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이곳에 살던 많은 교우가 순교했다. 최양업 신부도 배론을 가기 위해 이곳을 거쳤다고 여겨진다. 당시에는 배론으로 가는 길이 하나였기 때문이다.
순례길을 걷다보면 ‘님의 길’을 안내하는 끈이 군데군데 나뭇가지에 달려 있다.
화당리 순교자공원에서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면 장주기(요셉) 성인이 피신해 있었던 ‘너럴골’이 나온다. 이어 옛 공소에서부터 시작한 백운성당을 거치면 박달재휴양림이 보인다. 거리는 꽤 되지만 산길과 함께 강변길, 인도가 잘 나 있어 순례길의 백미인 풍광도 만끽할 수 있다. 곧이어 양업길의 깔딱고개 ‘양업재’(양업고개)가 나온다. 순례길 중 가장 힘든 코스에 속한다. ‘파랑재’라고도 하는데, 최양업 신부가 드나들었던 길을 기념해 양업재라 부르고 있다. 양업재를 넘어 2~3㎞ 정도 인도를 따라 걷다 보면 순례길의 종착지 배론성지가 나온다.
최양업, 배론에 잠들다
원주교구는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을 기원하며 님의 길뿐 아니라 ‘희망의 순례’도 마련했다.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전국 교구 30곳의 성지, 교우촌, 성당 등을 순례하며 발자취를 따라 걷는 여정이다. 희망의 순례도 시작하는 곳은 자유롭게 정할 수 있지만, 마지막 지점은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있는 배론성지여야 한다.
배론성지 입구에서 양업교를 지나 오른쪽 길로 따라 올라가다 보면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나온다. 묘소에는 그를 기리는 묘비와 시복시성 기도문도 함께 마련돼 있다.
배론성지에 안장돼 있는 최양업 신부 묘소. 베르뇌 주교와 신자들에 의해 이곳에 안장됐다. 묘소 양 옆에는 묘비와 석판에 새겨진 시복시성 기도문이 마련돼 있다.
묘소 참배 후 양업교를 건너 잔디광장으로 들어가면 바닥에 미로가 새겨져 있다. 이곳이 순례길의 마지막 장소다. 미로는 우주의 중심이신 주님, 내 마음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참된 자아를 상징한다. 지나온 길과 삶을 정리하는 차원이다.
이외에도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를 알 수 있는 조각공원과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아울러 배론성지는 신유박해 순교자 하느님의 종 황사영(알렉시오)이 백서를 쓴 곳이기도 하다. 백서를 쓴 토굴과 황사영 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또 배론성지는 한국 교회 최초의 신학교이자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 요셉 신학당이 있던 곳이다. 최양업 신부도 신학당에 들러 신학생을 돌봤고, 11번째 서한을 배론에서 쓰기도 했다.
배론성지 로사리오 길 초입 바닥에 새겨진 ‘인생미로’. 순례길의 종착지다.
최양업 신부를 배론에 안장한 베르뇌 주교는 추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12년 동안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구원에 이끌기 위해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든 끝까지 정도(正道)를 지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베르뇌 주교가 밝힌 것처럼 최양업 신부는 수품 순간부터 선종할 때까지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정확하게 지키며 한국 교회 성직자의 모범적인 사제 상이 되고 있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