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24시간 상담 기관에서 야간근무 중 한 청년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청년은 난치병 투병 중이고, 주변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이미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하려는 시점에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고 떠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청년 주변에는 유일하게 어머니가 계셨으나 어머니마저 치매로 요양원에 계셨고 아들을 못 알아볼 뿐 아니라 심한 욕설과 공격성을 보이는 상태였습니다.
청년은 지금까지 가혹할 만큼 힘든 삶을 살아왔고 전화할 당시의 삶도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청년은 어려서부터 마음 고생을 하며 살아왔고, 지금은 몸 고생까지 감당하게 됐다고 하면서 이제는 그만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청년에게 도움을 줄 방법은 없었습니다. 청년의 마음을 돌이킬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청년이 처한 상황이 안타까워 울었습니다. 그러자 청년도 같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새벽녘에 시작된 통화는 동이 틀 때까지 그렇게 이어졌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면서도 서로의 감정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이해가 됐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난 후, 저는 청년에게 아무런 도움이 못 돼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상담자로서 감정조절을 하지 못한 것도 사과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청년은 제가 함께 울어준 것이 그 어떤 말보다도 위로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울고 싶을 때,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될 때 한 번씩 전화해도 되는지 물어왔습니다.
여전히 울음기가 가시지 않아 쇳소리가 섞인 “그럼요”라는 저의 응답에 청년은, 한참을 울고 난 아이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웃는 것처럼 환하게 웃었습니다.
한번은 60대 후반의 여성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일흔을 바라보는 연세였고 전혀 꾸미지 않으셨지만 정말 아름다우셨습니다. 그런데 상담실에 들어오시는데 거동이 매우 불편해 보였습니다. 그녀는 몇 년 전부터 알 수 없는 마비가 와서 혼자서는 움직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국내는 물론 외국 병원도 가 봤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정신과 치료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부유했지만, 매우 엄하고 보수적인 집안에서 성장했고, 결혼도 집안 간 결혼으로 명망가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과묵했고 사업에만 집중했습니다. 사적인 관계가 거의 차단된 채, 누구의 아내로 더 엄격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습니다. 자녀도 없었기에 그녀의 삶은 조용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마비가 왔고, 자살 시도를 반복했고, 여전히 서먹한 남편에게 제발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부유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대화를 나눌 단 한 명의 친구도 없는 그녀에게 저는 사이좋은 오누이처럼 재잘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도 조금씩 감정을 표현하고, 입에 물린 재갈을 풀고 같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상담회기가 거듭되면서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의 인형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진짜 나로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젊은 시절 꿈이었던 그림을 시작했고, 집을 다양한 자기표현을 위한 작업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지팡이의 도움이 필요하긴 했지만, 차츰 경직된 몸이 풀리고 타인의 부축 없이 상담에 오기 시작했습니다.
황순찬 베드로 교수
인하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