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길에는 다양한 만남이 있는데 참으로 귀한 만남이 있으면 피하고 싶은 만남도 있고, 때론 인생길에 쓰러진 이들을 보기도 합니다. 루카복음 10장에도 그렇게 길에 쓰러진 이가 나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보고’는 지나쳐 반대로 돌아갑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겠지만 그들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은 피를 만지거나 죽은 이를 접촉하게 되면 부정한 사람이 되어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무엇을 더 기뻐하시는지를 안다면 이는 명백히 작은 선을 위해 큰 선을 저버리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에 비해 사마리아인과 유다인은 서로 관계가 나빴기에 그냥 모른척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과거 비슷한 경험이 있었는지 쓰러진 이를 ‘보고’는 그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고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OECD 1위라는 한국의 자살률은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방송 미디어나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을 통해 그러한 죽음들을 늘 접하고 있습니다. 이제 머리로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정신질환, 폭력의 희생, 회복 불가한 신체적 고통, 삶의 절망적인 고통 등 다양한 요인이 자살의 원인으로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진정 ‘애통한’ 마음으로 자살로 죽음에 이른 연령을 위해 기도하고, 자살유가족을 돌봐야 합니다.
그러나 애통한 마음을 갖는 것과는 별개로 가톨릭 신앙인은 이 시대의 자살 문제가 갖는 심각성을 인지하고, 자살 예방 실천에 개인과 신앙 공동체가 함께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고 자살 위기자를 구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살 위기에 처한 내 이웃을 ‘내가 돌봐야 하는 내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는 것은,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하신 하느님께 카인이 한 “모릅니다”라는 대답을 떠올리게 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라고 말했듯이 신앙인은 더 적극적으로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오늘날 “무관심의 세계화”가 빚어내는 비극적인 사건들을 언급하며 현대인의 슬퍼할 줄 모르는 능력을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많은 현대인은 타인의 고통을 직접 ‘보고’ 미디어를 통해 매일 접하면서도 이에 대해 무감각하고 남의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어떻게 울어야 할지 모르고,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로부터 슬퍼하는 능력을 없애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사람이 악하거나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선량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이웃을 향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약한 이들은 자신의 수명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은 우리의 무관심한 마음과 투쟁하고 계십니다.
차바우나 바오로 신부
서울성모병원 영성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