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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의 달 특집] 가톨릭교회가 남긴 한국의 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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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가난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한국인은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사명을 일깨워주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았다. 한국 땅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고통받는 이들을 돕고자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시작했다. 성경과 십자가만으로 사람들을 살릴 수 없었기에 고아원과 무료진료소를 짓고,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오래 전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시작한 일들은 한국사회의 기틀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흔적은 몇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밝게 비춰주고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톨릭의 오래된 흔적을 찾아본다.


■ 고아원

전쟁과 약탈로 부모를 잃은 아이가 많았던 조선시대. 선교사들은 선교와 함께 고아 구호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렇게 1852년 우리나라 최초의 고아원인 성영회가 시작됐다. 당시 성영회는 고아를 맡아 키우기에 적합한 신자 가정을 선발해 아이를 맡긴 뒤 양육비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정의배(마르코) 성인은 이 일을 맡아 아버지처럼 고아들을 돌봤다고 전해진다.

훗날 조선교회는 성영회 본부의 지원을 받아 사업을 전개, 1859년 43명, 1862년 11월에는 78명의 고아들을 양육했다. 사업이 확장되자 성 베르뇌 주교는 서울에 고아원을 설립해 고아들에 대한 양육과 교육을 동시에 실시하려 했으나 병인박해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고 사업이 중단됐다.

성영회 사업은 박해 후인 1870년대 말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재입국하면서 재개됐다.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사목하던 선교사들이 블랑 주교에게 보낸 1884년 4월 21일자 보고서에는 1883년부터 1884년 4월까지 성영회 어린이 4명의 부양비로 124냥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경상도 지역을 사목하던 로베르 신부도 1885년부터 성영회 사업을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블랑 주교가 1885년 3월 서울 곤당골(현 소공동)에 고아원을 설치, 영아들에게 체계적인 양육과 교육을 실시하려던 계획이 23년 만에 실현됐다. 원아 수가 늘어서 1887년 9월경 서울 종현에 새 건물을 매입해 이전했고 1887년 7월 26일에는 고아원을 충실하게 운영하기 위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1888년 7월 22일 입국한 4명의 수녀는 고아원을 인수받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1894년 제물포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은 인천 해성보육원으로, 1915년 대구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은 대구 백백합보육원으로 각각 그 뜻을 이어갔다.


■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

한국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은 1855년 충청도 배론에 설립된 성 요셉 신학교다.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폐교됐지만 운영되는 동안은 조선 최초로 서양의 근대 학문을 가르치고 배웠다는 점에서 교회사적 의의가 크다. 학생들은 라틴어를 비롯해 한글, 한문, 수사학, 천문학, 음악, 지리, 역사, 자연과학 등의 인문 교양을 배웠고 스콜라 철학과 신학도 학습했다. 또한 신학생으로서의 자격만 갖추면 조선사회의 전통적인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든지 입학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성 요셉 신학교는 한국에 근대 교육을 도입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는 근대교육기관은 계성초등학교다. 계성초는 초·중·고등학교를 통틀어서 가장 오래된 학교로 기록된다. 1882년 인현학당이었던 학교는 이듬해 서울 종현(현 명동 가톨릭회관 근처)으로 옮기며 종현학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 학당은 종교 교육뿐만 아니라 한문과 한글을 비롯해 여러 과목들을 가르치면서 근대 계몽교육을 실시했다. 학생 수가 점차 늘어나자 공간 부족과 경제적 문제로 일시적으로 폐쇄하기도 했지만 1900년 말에 다시 문을 열었다. 1900년 가을에는 여학생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면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교육을 위탁했다. 1909년 8월 프와넬 신부의 명의로 4년제 보통학교 인가를 받으면서 계성학교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그리스도의 빛으로 세상을 인도할 인재를 양성하는 배움의 터전으로 삼고자 하는 바람을 담은 계성학교는 1910년 4월 4일 첫 번째 졸업생을 배출했다.



■ 무료진료소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에 의해 의료시설이 운영되고 있었지만, 무료진료소는 수녀들에 의해 처음 시작됐다.

1886년 블랑 주교가 세운 양로원에 아픈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진료소를 병설했다. 1886년 서울대목구 연보에 실린 보고서에 따르면 “젊을지라도 중한 환자이면 이 진료소에 입원시켜 치료해 주고 있는데 환자들은 너무 가난한 자들이거나 비신자인 부모 밑에서 임종대세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신자들입니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의료 활동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조선에 정착하면서 더욱 확대됐다. 병들고 가난한 이들이 늘어나자 1894년 제물포 수녀원에서 무료 진료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1898년 5월부터 1899년 4월 사이에 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은 환자가 5373명이었고 수녀들이 직접 방문해 치료한 환자가 435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1982년 마리아 수녀회가 개원한 서울 은평구 도티기념병원도 무료진료소로 운영됐다. 영양실조나 결핵, 홍역, 간염 등을 앓고 있는 가난한 이들과 행려인, 중증장애인, 건강보험증이 없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 병원에서 무료로 건강을 되찾았다. 서울 하월곡동에 있던 성가병원은 1990년 무료 성가복지병원으로 전환됐다. 성가소비녀회는 설립 은사를 따라 병들고 고통받고 무의무탁한 사람들을 돌보고자 결단을 내린 것이다. 가난 때문에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 길거리에 사는 이들,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외국인 노동자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무료로 진료를 시작한 성가소비녀회의 여정은 33년째 기적처럼 이어지고 있다.


■ 출판사

조선어 사용에 익숙하지 못한 선교사들이 원활하게 선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천주교 서적이었고, 블랑 주교는 일본 나가사키의 성서 활판소를 서울 정동에 있던 프와넬 신부의 사택 별채(지금의 이화여중 앞)로 이전했다. 이로써 1886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 출판사인 가톨릭출판사가 설립됐다. 근대적 민간 출판사인 광인사가 1884년 세워졌으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출판사는 가톨릭출판사다. 출판사 설립과 함께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적극적으로 출판 활동을 펼쳤다. 1895년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명단과 약전을 수록한 「치명일기」를, 1905년에는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순교 사적을 조사 기록한 「기해일기」를 각각 간행했다. 그동안 필사본으로 전해오던 성경직해를 9권으로 간행해 대대적으로 보급했다. 뮈텔 주교가 부임한 이후부터 1911년 사이에 간행된 교리서는 10종으로, 신자들의 성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계기가 됐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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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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