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환경 이슈에 빠지지 않는 핵발전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민감한 문제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와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어 탈핵을 외치며 거리로 나온 신앙인들에게 “신부님과 수녀님이 왜 교회 밖을 나와 사회적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냐?”는 질문은 늘 따라붙는다.
핵발전이 인류에게 유익하다는 입장과 인류를 파괴하는 에너지라는 입장이 대립하는 가운데, 일본과 한국 신앙인들이 그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순례를 떠났다. 일본에 세워진 수많은 핵발전소를 둘러보며 이들이 내린 결론은 “핵발전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순례의 끝에 탈핵을 외치며 다시 길 위에 선 신앙인들. 7박8일의 순례는 이들에게 무엇을 남긴 것일까?
■ 창조질서 파괴된 현장에서 함께 손잡다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와 일본주교회의 정의와평화협의회는 10월 13일부터 17일까지 일본 후쿠이현에서 ‘제9회 한일 탈핵 평화순례 및 간담회’를 진행했다. 한일교회가 함께 탈핵을 위한 방안을 찾고 연대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다. 이번 평화순례는 특별히 일본주교회의 정의와평화협의회 담당이자 센다이교구장인 에드가 가쿠탄 주교의 초청으로 공식 일정이 끝난 17일부터 20일까지 센다이교구 지역에 있는 핵발전소와 후쿠시마 제1원전 인근을 둘러봤다.
한국에서는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 박현동(블라시오) 아빠스, 총무 양기석(스테파노) 신부를 비롯한 사제와 수도자, 활동가 16명이, 일본에서는 에드가 가쿠탄 주교와 탈핵 소위원장 미쓰노부 이치로 신부, 나이토 신고 목사 등 20명이 참석했다. 사제와 수녀, 목사와 평신도 등 사는 곳과 직업이 다른 36명이 ‘탈핵’을 목표로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순례는 13일 나고야교구 주교좌누노이케성당에서 ‘노후 핵발전소 가동연장’에 대한 강의로 일정이 시작됐다. 이날 교류모임에 함께한 가쿠탄 주교는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것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닌 함께 모여서 행동하는 것”이라며 “이번 평화순례를 통해 핵발전에 대한 공동의 이해를 나누고 각자 자리에서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을 찾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격려의 말을 전했다.
14일부터는 본격적인 핵발전소 순례가 시작됐다. 후쿠이현의 쓰루가·몬주·오오이·다카하마 핵발전소를 방문하고 센다이교구로 넘어간 순례단은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예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게 된 주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핵발전이 경제적인 혜택을 가져온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입장에 대한 진실을 알고자 류코쿠대학교 경제학과 오시마 겐이치 교수의 ‘핵발전 비용 문제’ 강의도 진행했다.
특히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이후 방사능폐기물처리비용과 사고대책비용 등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비용이 국민에게 전가되고 있는 일본의 현실을 전하며 오시마 교수는 “핵발전소가 많을수록 국민이 더 많은 부담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한국 사람들에게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고 전했다.
■ 첨예한 핵발전 문제, 연대에서 답을 찾다
1978년 한국에서 최초로 상업가동된 고리원전 1호기가 2017년 가동을 멈춘 뒤, 현재까지 가동되고 있는 핵발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983년 상업가동을 시작한 고리 2호기다. 한국의 핵발전은 이제 갓 40년을 넘겼지만, 일본은 40년 이상 된 원전이 4기나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49년이 된 다카하마 1호기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일본에 40년 된 원전을 예외적으로 20년 연장하는 제도가 생기면서, 노후 원전 가동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지난해 8월 탄소중립을 위한 녹색전환추진 전략의 일환으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원전 회귀를 검토하라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를 반대하는 시민들은 ‘원전40년폐로소송시민모임’을 만들어 오래된 핵발전소 운영이 위험하다며 노후 핵발전소의 ‘운전기간 연장 인가’ 등의 취소를 요구하는 소송을 진행중이다. 노후화를 비롯해 지진과 화산으로 인한 위험성, 사용후 핵연료 수조가 포화상태가 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운전기간을 연장하는 것은 주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핵발전소 자체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핵발전소를 운영하는 전력회사는 스스로 위험성을 평가해 심사한 결과를 토대로 원전 가동을 연장했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피해 통계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고, 어민들의 동의를 구한 뒤 핵오염수를 방류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 이러한 불신은 일본 국민들의 삶을 더욱 황폐화시키고 있었다.
한국에서 핵발전소를 막고자 싸우고 있는 한국의 순례자들은 핵오염수 방류로 하느님의 창조질서가 파괴된 현장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일본을 방문해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일본의 노후 원전 문제, 핵발전소 사고가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순례에 참여한 이옥분(제르트루다)씨는 “일본에 생각보다 많은 핵발전소가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놀랐고, 우리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됐다”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힘이 약할지 모르지만, 힘을 하나로 모은다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전했다.
핵발전소를 방문하고 인근에 사는 주민들을 만나며 내내 마음이 무거웠던 순례자들은 마지막 날 일본인들과 집회에 함께하며 “탈핵”을 외치며 무거웠던 마음을 조금씩 털어냈다. 이날의 집회가 당장 핵발전소를 멈출 수는 없지만 나와 같은 생각으로 함께 걷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연대감은 각자의 자리에서 탈핵운동을 이어갈 힘이 될 것이다.
일본인 참가자 야하기 히사코(미카엘·69)씨는 “핵발전소 사고 이후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에 이번 순례에 참여하게 됐다”라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었는데 이곳에서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을 만나서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다”고 전했다.
일본 후쿠이현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