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불화, 폭력과 학대, 학교 부적응, 장기 실직, 관계단절, 외로움, 질병, 심각한 재정적 압박 등과 같은 사회환경적 문제 등이 자살 행동의 발단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개인의 의지, 가족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들고 사회적 개입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의 자살 심각성은 한국형 복지국가 디자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표징(表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살 행동은 ‘경계가 무너진 시간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부정적 경험을 반복하면 과거뿐 아니라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 역시 고통스럽게 지각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미래를 열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삶의 조건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사회에 나가면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통해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고, 한부모 가정이라도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게 가능하고, 실직 상태에서도 최소한의 생활과 새로운 기회가 부여되어야 시간성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 보면, 자살시도자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너무나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시간성은 사회복지서비스, 복지권(entitlement) 등의 필요성을 확인해주는 것으로, ‘생색내기’식 복지나 정신의학적 자살 예방이 아닌 노동, 복지, 건강, 돌봄, 관계, 노후 등을 보장하는 통합적인 사회 정책이 중요한 자살 예방 방법임을 시사합니다.
자살 행동은 가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모든 자살시도자가 의식하는 자살 행동의 근원에는 세상(사회)과 더불어 가족이 있습니다. 자살시도자들이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삶은 한마디로 ‘폭력적이고 불행한 가족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불행의 흔적을 행여 타인이 알아챌까봐 눈치 보며 끝없이 새로운 삶을 모색했지만, 가족보다 더 폭력적인 사회를 경험하며 자신이 찾는 것은 언제나 어디에도 없다는 것만 체험한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예방하고 대처하기 위해 국가 정책의 최우선 과제는 건강한 가정, 건강한 양육환경 지원이어야 합니다. 신체적·성적 학대, 정서적 방임과 유기 등 가정폭력과 성폭력 피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어린 자녀를 둔 젊은 부모나 한부모에 대한 지원을 대폭 확대해야 합니다. 만약 부모가 아이를 제대로 양육할 수 없다면, 국가가 아동 청소년의 보호자로서 최적의 양육환경을 제공해야 합니다.
자살 행동은 단절된 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대다수 자살시도자는 자신이 혼자이고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호소합니다. 특히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황에서는 더더욱 사람들을 만나기 주저하고 꼭 필요한 도움 요청마저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만나는 사람마저 제한돼 있어, 현재 자신의 상태를 주위에서 알 수가 없습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이들의 생활을 이해하고 일관된 관심을 제공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합니다. 현재 사회서비스 제공체계는 대부분 발생한 문제에 사후대처하는 형태로 되어 있으나, 앞으로는 일상적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관계를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춘 사회서비스 체계의 개혁과 누구도 관계에서 소외되지 않는 사회참여 방안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황순찬 베드로 교수
인하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