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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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이·절구·맷돌질하는 여인들… 사랑 깃든 일상의 숭고함 드러내

[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9. 여인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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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여인’,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해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해주에서 만난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여인’

아궁이에 콩대나 싸리나무를 태우면 타닥타닥 소리가 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소리가 마치 곡식 영그는 소리와 같다 해서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한 해 농사의 대풍을 기원하며 오곡밥을 짓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땠다. 또 정초부터 집집이 아궁이에서 나는 이 요란한 소리로 집안의 잡귀를 몰아냈다. 이를 ‘액막음’이라 불렀다. 이처럼 아궁이는 곡기가 드나드는 곳이어서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과 천지의 기운이 드나드는 주방과 함께 집을 짓고 관리할 때 가장 중요하게 살필 공간이었다.

아궁이는 방마다 온돌을 데우는 함실 아궁이와 솥을 걸어두고 음식을 조리하는 부뚜막 아궁이로 구분된다. 부뚜막 아궁이는 함실 아궁이보다 뒤늦게 사용된 시설로 온돌을 데움과 동시에 조리를 하는 다용도 시설이다. 그래서 함실 아궁이는 아궁이가 하나뿐이지만 부뚜막 아궁이는 온돌방 크기에 따라 1~2개 또는 2~3개를 냈다. 부뚜막 아궁이에 건 솥의 수를 보면 그 집의 살림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5월 황해도 청계리성당으로 가는 길에 해주에서 명망 있고 부유한 교우 집에 묵었다. 베버 총아빠스는 이 집을 살피면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여인’<사진 1>을 촬영했다. “문 하나를 열어보니 안쪽으로 넓은 공간이 열렸다. 양방향 지하 난방 시설(아궁이)을 갖춘 틈새 공간이었다. 오른쪽으로는 집주인과 그 형제들 방을, 왼쪽으로는 부녀자들 방을 덥힌다. 구덩이에는 땔감이 넉넉히 보관되어 있었다. 부잣집이 아니면 보통 이런 문간에는 외양간이 있다. 깊이 파인 황토 아궁이에 가마솥이 나지막이 걸려 있는 걸 보니 반대편은 필경 부엌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365~366쪽)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부뚜막 아궁이에 3개의 가마솥이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제법 살림 규모가 넉넉한 집임이 틀림없다. 부뚜막과 아궁이 주변이 깔끔할 뿐 아니라 부엌 안까지 볕이 잘 들게 넓은 부엌문과 부뚜막 옆으로 창을 내놓았다. 이런 모습을 보아 이 집 가풍도 어느 정도 짐작할만하다. 아궁이에 불을 때는 무명옷 입은 여인은 손이 두껍고 거친 걸로 보아 안주인은 아니고 집안 살림을 맡아 하는 여인인 듯하다.

무명옷을 입던 시절 다듬이질은 일상이었다. 옷을 세탁한 후 풀을 먹여 약간 말려서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두 사람이 마주앉아 방망이로 두드렸다. 다듬이질하면 옷에 광택이 나고 촉감이 살아난다. 씨실과 날실이 제자리를 잡아 조직이 치밀해지기 때문이다. 다듬이질할 때 천을 제대로 접지 않으면 뚫어질 수 있어 여러 폭을 접어 방망이로 두드린다. 다듬잇돌은 주로 청석으로 만드는데 강화도에서 나오는 애석(艾石)이 최상품이었다고 한다.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다듬이질하는 여인들’, 유리건판, 1911년 3월 경기도 하우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여인들의 다듬이질 모습에 고향 집 연상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3월 경기도 의왕 하우현성당을 방문했을 때 한 교우 집에서 다듬이질하는 여인들을 촬영했다.<사진 2> “한 무리의 아낙과 소녀가 시냇가에 쪼그리고 앉아 주일인 내일 쓸 면포를 서둘러 빨고 있었다. 옆집에서는 여인 둘이 마주 보고 앉아 마른빨래를 부지런히 다듬이질한다. 좀 떨어진 곳에서 그 소리를 들으면, 오래전부터 성탄 방학 추운 겨울날 아침 고향 집에서 듣던 빠른 도리깨질 박자와 흡사하다. 그것은 마치 아침 인사처럼 따뜻한 침대 속까지 파고들곤 했었다. (?) 안방 문으로 드는 툇마루 한 귀퉁이에 어머니와 딸이 평평한 돌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어린 소녀 하나가 곁을 지킨다. 문득 그들이 일손을 멈추고 긴 나무 방망이는 무릎 위에 내려놓은 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켜켜이 쌓인 빨래들은 오늘 중으로 다 다듬으려면 밤늦도록 두드려야 할 테니 우리가 방해하면 안 된다. (?) 사실 우리는 바로 이 다듬이질을 보려고 왔다. 다시 다듬잇돌에 개켜 놓인 빨랫감 위로 네 개의 방망이가 날아들었다. 곁에 앉은 어린 소녀는 빠르게 내리꽂히는 방망이에 손가락을 끼지 않고 능숙하게 빨래를 뒤집고 돌리는 재간이 있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95~197쪽)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다듬이질하는 여인들’의 사진은 여행기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기록한 어머니와 딸, 손녀 3대가 다듬이질하는 그 장면이 아니다. 그 모습을 보고 여교우들에게 도움을 청해 재현한 듯하다. 왜냐하면 다듬이질하는 두 여인이 비슷한 연배이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서 있는 여인도 제법 과년한 규수 티가 난다. 그리고 다듬이질할 빨랫감도 다듬잇돌 위에 올려진 것 하나뿐이고, 다듬이질도 툇마루 귀퉁이가 아니라 툇마루 아래 마당에 멍석을 깔고 하고 있다. 베버 아빠스는 여인들의 다듬이질 모습이 고향 집을 연상시켰듯이 아주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절구질하는 여인들’,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해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절구질·맷돌질하는 여인들도 사진에 담아

절구와 맷돌은 부엌 살림살이에서 필수 도구였다. 벼·보리·조·수수 등 곡물과 고추·깨 등을 빻고 갈아야 했기 때문이다. 절구는 나무와 돌·쇠로 만들었다. 나무 절구는 위아래 굵기가 같은 것이 많지만, 허리가 장구처럼 잘록한 것도 있다. 부잣집들은 크고 작은 절구를 두루 갖춰 골라 사용했다. 절구질 역시 다듬이질처럼 두 사람이 하는 것이 기본이다. 한 명은 절구질하고, 다른 한 명은 나무 주걱으로 빻은 곡물을 뒤집어주는 ‘께낌질’을 했다.

고추·깨·소금 등 양념을 다지는 절구는 주로 무쇠로 만들었다.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5월 황해도 청계리에서 1m 남짓한 절굿공이를 들고 통나무 절구에 든 벼를 찧고 있는 ‘절구질하는 여인들’을 촬영했다.<사진 3> 그는 절구의 모양새와 절구질하는 방식이 아프리카 흑인들의 그것과 너무 닮아 신기해했다.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맷돌질하는 여인들’,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해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아울러 그는 ‘맷돌질하는 여인들’도 사진에 담았다.<사진 4> “다른 집 마당에서는 천천히 맷돌을 돌리고 있었다. 조작이 덜 복잡할 뿐 작동 원리는 독일 시골 방앗간의 마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 약 반m의 아랫돌을 바닥에 수평으로 고정시키고 그 위에서 윗돌을 돌린다. 윗돌에는 나무 손잡이가 세로로 꽂혀 있다. 맷돌질은 두 여인이 함께하는데, 한 여인은 가끔 옆에 놓인 자배기에서 쌀알을 한 움큼 집어 구멍에다 넣는다. 쌀알은 윗돌 가운데 뚫린 구멍을 통해 윗돌과 아랫돌 사이로 빠져나온다. 오늘 필요한 몫은 이미 넉넉히 갈았을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423~424쪽)

청계리의 맷돌질하는 여인들 사진에는 세 아낙네가 주인공이다. 세 명이 한 손으로 어처구니를 잡고 맷돌을 돌린다. 맨 오른편 여인이 왼손으로 한 움큼 곡물을 쥐어 맷돌 구멍에 집어넣을 참이다.

베버 총아빠스의 사진에는 휴머니즘이 있다. 서로를 존중하는 고귀함이 배어 있다. 특히 ‘일상의 숭고함’이 잘 드러난다. 그의 사진에서 일상은 단순히 고되지만 견뎌야만 하는 길들어진 삶이 아니다. 다듬질과 절구질·맷돌질에서 서로의 수고를 함께 나누는 품앗이를 통해 공동선을 향한 연대를 드러낸다. 20세기 신학자 칼 라너는 이러한 삶을 ‘사랑이 깃드는 몰아의 태도’라고 표현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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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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