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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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때 형성된 유서깊은 ‘작은 한티’

[공소(公所)] 19. 대구대교구 동명본당 남원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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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동명본당 남원(원당)공소는 1866년 병인박해 때 경상도 북부 지방과 한티교우촌에서 내려온 교우들이 모여 살면서 시작된 유서깊은 교우촌이다. 남원공소 전경

 

동명본당 남원(원당)공소는 대구대교구와 칠곡군이 조성한 한티 가는 길 제4구간 ‘용서의 길’ 순례지로 지정돼 있다. 새로 단장한 남원공소 내부.

 

 


경북 칠곡군 남원리는 팔공산 서쪽 산자락에 자리한 마을이다. 남원리 북쪽에는 가산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경상도 관찰사 이세재가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 1700년부터 2년에 걸쳐 지은 산성이다. 험준한 자연 지세를 이용해 축조한 가산산성은 6ㆍ25 전쟁 때 국군과 인민군 간의 치열한 교전을 벌인 격전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지금은 전원주택 단지로 개발돼 사람들의 왕래가 잦지만, 조선 왕조 시기 첩첩산중이었던 이곳은 박해를 피해 교우들이 숨어 살던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경상도 일원에서 한티로 피신한 교우들이 처음으로 이곳에 정착했다. 한티와 남원리는 약 4㎞ 거리다. 이들과 함께 한티 교우촌 신자들이 남원리에 내려와 새롭게 자리 잡으면서 대구대교구 동명본당 관할 남원(원당)공소가 시작됐다. ‘원당’(元堂)은 남원리에서 가장 먼저 생긴 중심 마을이라 해서 불리는 이름이다. 그래서 공소 이름도 남원과 원당을 같이 부르고 있다. 이런 연유로 남원(원당)공소의 역사를 알려면 한티순교성지의 유래를 먼저 알아야 한다.



자생적으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

한티성지는 팔공산과 가산 사이에 있는 첩첩산중의 교우촌이다. 이곳에 교우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신나무골성지와 마찬가지로 1815년 을해박해 전후로 추정한다. 이때부터 계속해서 경상도 북부 지역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한티로 몰려들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경상도 지역 천주교 신앙 전래 과정을 간략히 소개한다.

경상도 북부 지역인 문경ㆍ상주ㆍ안동 등은 일찍이 충청도에서 이주한 교우들로 교우촌이 형성됐다. 이에 반해 동래ㆍ양산ㆍ언양 등 남부 지역은 드러난 신자 중에 다른 지역 출신이 거의 없다.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신자들이 아니라 이 지역으로 유배를 온 교우나 토착민에 의해 자생적으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교회사 학자들의 일반 견해이다. 경상도 중부 지역은 북부와 남부 지역에 독자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된 다음, 점차 칠곡ㆍ동명ㆍ군위ㆍ영천ㆍ청도ㆍ경주 등 중부 지역으로 신앙이 전파되면서 교우촌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한다. 그 시기는 1860년 경신박해 전후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경상도 중부 지역에 공소가 급증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티 이야기로 돌아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신나무골에 살던 김현상(요아킴) 가족과 충청도 출신 전사베리오의 가족이 박해를 피해 한티로 숨어들어왔다. 1860년 경신박해 때는 한티 교우들이 대구 인근 달비골로 피신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신나무골에 살던 이선이(엘리사벳) 가족이 한티로 피신해 사기굴에 숨어지내다 포졸들에게 체포돼 순교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대구와 신나무골 등 경상도 일원의 신자들이 한티로 피신했다. 이에 1868년 무진년 때 서울 포교들과 가산산성 병사들이 한티교우촌을 덮쳐 교우들을 마구잡이로 처형했다. 이때 40여 명의 교우가 순교했다. 또 체포된 교우들은 서울로 압송 중에 학명리 흑다리에서 순교했다. 포교들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그 자리에 버리고 떠났다. 대구대교구는 한티순교성지와 신나무골성지를 교구 신앙 공동체의 요람으로 인정하고 있다.

 

 

 

 

동명본당 남원(원당)공소 마당 성모상.

 


옹기와 숯 구워 연명하며 전교

남원공소는 병인박해 때 경상도 북부 지역과 한티에서 내려온 교우들이 몰래 숨어 살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이곳 교우들은 옹기와 숯을 구워 연명했다. 비록 가난했지만, 남원리 교우들은 여릿재를 넘어 학명리와 동명을 지나 여부재를 넘어 신나무골로 오가며 마을 주민들에게 전교했다. 그 결실로 병인박해가 끝날 무렵에는 남원리에 사는 신씨와 최씨, 송씨 문중 교우들이 모여 주일 첨례를 했다고 한다. 주일 첨례는 최씨의 아래채 사랑방에서 모여 거행했는데 이 집이 1893년 설립된 남원공소의 모체가 된다.

1900년대 초부터는 남원공소 교우 수가 한티의 교우 수보다 많았다. 그래서 한티에 다니던 많은 교우가 남원공소에 모여 주일을 지키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한때 남원공소는 ‘작은 한티’로 불리기도 했다.

1895년 가실본당이 설립돼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남원공소를 사목했다. 1928년 왜관본당이 설립되자 남원공소는 왜관 관할이 됐다. 또 1932년 초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의 교구 관할 지역 분리에 따라 남원은 비산본당에 속하는 공소가 됐다.

이후 1957년 칠곡본당 설립과 1978년 동명본당 설립에 따라 관할이 바뀌어 지금은 동명본당 관할로 돼 있다.

6ㆍ25전쟁 때 폭격으로 공소 건물이 소실되자 최만학(베드로)씨가 공소 대지 100평을 기부해 철거된 학명리공소 자재를 사용해 지금의 남원공소를 지었다.

경북 칠곡군 남원로3길 98-2에 자리한 남원공소는 대구대교구와 칠곡군이 조성한 한티 가는 길 제4구간 ‘용서의 길’ 순례지로 지정돼 있다. 지난 4월 1일 순례자들을 위해 공소를 새로 단장하고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가 축복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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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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