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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단상] 신부님에 대한 미움, 빗자루가 되다(김정환 아우구스티노, 중년의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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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어떤 신부님을 미워한 적 있으신가요? 부끄럽지만 저는 있습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가신 본당 신부님이었는데, 강론이 너무 길고 난해했어요. 새벽에 미사를 나가면 내심 좀 빨리 끝났으면 싶지요. 그런데 그 신부님은 도무지 알아듣기 힘든 추상적인 얘기를, 십 분도 십오 분도 이어가셨습니다. 영성체를 하고서 이제야 가나 싶은데 또 이야기를 덧붙이기도 하고요. 나중에는 자꾸 미운 마음이 올라와서, 그 마음을 다잡느라 혼자 속으로 씨름을 했습니다.

지난겨울, 눈이 펑펑 내리던 새벽이었어요. 뒤뚱거리면서 어렵사리 성당에 갔는데, 그날도 공허한 말들이 이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자비, 회개와 기도, 천국에서 받을 상…. 물론 좋은 말씀이지요. 그런데 하나도 와닿질 않았습니다. 가뜩이나 모호한 성경 내용을 좀 쉽고 구체적으로 풀어주셨으면 좋겠건만, 강론이 한술 더 뜨는 거예요.

아마 오가는 길이 힘들어 불만이 더 컸겠지요. 성당을 나설 때도 폭설은 여전했고, 툴툴거리면서 돌아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내 삶은 어떻지? 강론이 추상적이라고 불평하는 나는, 가톨릭 신자로서 세상에 얼마나 구체적인 기여를 하고 있지? 손에 잡히지 않는 강론이 불만이라면 저라도 손에 잡히는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강론이나 제 삶이나 내실 없기는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무엇을 해야 할지가 떠올랐습니다.

집에 돌아와 젖지 않는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근처 철물점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가게 문이 열려있어 기다란 빗자루를 하나 샀지요. 그러고는 집 근처부터 눈을 쓸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처음에는 왠지 부끄러웠어요. 괜히 착한 사람인 척한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기도 하고, 돈 받고 일하는 사람으로 보이면 억울할 것도 같았지요.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이번에는 ‘누가 내게 고맙다고 안 해주나’, 싶은 생각도 올라왔습니다. 사람 생각이 참 얄팍하지요. 그렇게 잡념이 들 때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에만 집중하는 사이, 싸악싸악 길이 나고 몸에도 마음에도 훈김이 났습니다.

물론 결과론일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이것도 신부님 덕분입니다. 답답한 강론이 아니었던들, 저는 그날도 제 발밑만 조심조심 살피면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겠지요. 어쩌면 예수님은 그 난해한 강론을 통하여 제게 메시지를 전하신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답답하냐? 어떤 강론이든 핵심은 사랑과 실천이다. 너는 나를 따르겠다고 늘 말하지 않느냐? 그러면 너부터 구체적으로 행하거라. 나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언제나 그러했더니라.’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로는 신부님에게 별로 미운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강론이 복잡한들 본뜻은 짐작할 만했고, 신앙인으로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신부님의 깊은 생각을 제가 따라가지 못했구나 싶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신부님 덕에 신앙의 폭을 조금 넓혀 볼 수 있었으니 감사한 일이지요. 

그날 산 빗자루는 대문 옆에 잘 세워 두었습니다. 내년 겨울에 눈이 오면 또 나설 생각입니다.



김정환 아우구스티노(중년의 대학생, 연세대학교 심리학·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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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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