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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이르는 고통은 생존이 아닌 삶으로 가는 길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20.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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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생존이 되면 좋은 삶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다. 우리가 겪는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살아나야 영적 감수성도 회복된다는 점을 성찰해보자. pixabay 제공


살짝 넘어졌다 하면, 속이 조금 거북하다 싶으면, 잇몸이 부었다 하면 즉시 병원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아프기 전에 빨리 병원에 가는 것이 상책”이라고 한다. 아파서가 아니라 아플까 봐 병원에 간다는 말이다. 하기야 남 말하면 무엇하랴. 나 역시 며칠 전 기침이 나오고 컨디션이 좋지 않자 불안감이 올라와 증상과 별개로 감기약을 먹었다. 어느 순간부터 약간의 통증이 오면 참기보다 진통제부터 찾는 습관이 생긴 것 같다.

현대사회의 새로운 질병 중 하나가 ‘건강염려증’이라고 한다. 경미한 증상에도 중병으로 의심하고 불안해한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10명 중 8명에게 5가지 약은 기본이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약을 먹으면서 아픈 곳이 더 늘어난다고 하는 이가 있고, 약물 부작용을 막기 위해 또 다른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통증을 없애기 위해 약을 밥처럼 먹는 세상, 바로 우리의 삶이 ‘생존’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철학자 한병철은 「고통 없는 사회」에서 “삶이 생존이 되면 좋은 삶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생존하기 위해 살만한 좋은 가치와 의미를 희생시키기 때문이란 것이다. 생존을 위해 분투해야 했던 코로나 팬데믹 시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역사상 처음으로 공동체 미사까지 중단되었다. 생존하기 위한 결단이었고, 서로를 지키기 위한 사랑의 행위라고 믿었다. 매일 감염자 숫자가 집계되면서 서로를 감시하고 의심하고 격리되었다. 게다가 일단 감염되면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혀 갇혀 지내야 했다. 감염자와 접촉한 사람까지 추적하면서 이동과 접촉이 제한되었다. 이렇듯 생존하기 위해, 고통을 막으려고 종교도 사랑도 친구도 일상도 모두 희생되어야 했다.

누구나 생존하기 위해 고통을 밀쳐내는 지독한 본능이 있다. 하지만 손만 뻗으면 즐길 거리가 지천에 널려있는 세상은 통증 없는 쾌감을 더욱더 욕망하도록 부추긴다. 대부분의 작은 습관들은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은 데서 만들어진다. 심리적으로 허기질 때 배가 고프지 않아도 무언가를 마구 먹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감정을 억압하는 것도 과잉감정이나 집단광기까지 모두 나에게 오는 고통을 막기 위한 행위다. 고통을 피하려는 이런 행위는 반복할수록 강화된다. 동시에 버티고 인내하여 얻는 면역력은 약화된다. 결국 고통을 견디는 내성은 약화되고 즐거움을 잘 느끼지 못하는 만성적인 무기력증을 경험하게 된다.

고통 없는 진통과 마취로 얻어지는 쾌감은 행복일까? 고통을 제거하면 행복은 찾아오나? 뼈가 부러지고 칼에 찔려도 통증을 느낄 수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사실 누군가 때려도 화상을 입어도 넘어져도 아프지 않은 병이 있다. 피가 철철 흘러나와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할 뿐,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병, ‘무통증’이란 희소병이 있다. 상상만 해도 고통스럽지 않은가? 고통 없는 고통만큼 무서운 고통이 또 있을까 싶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인 스콧 펙은 삶이 편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고통이 되고, 삶은 힘든 것이라 여기면 고통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고통받으면서 오히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사실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살아나야 영적 감수성도 회복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도 ‘구원에 이르는 고통’에서 우리는 고통 체험으로 길러진 영적 감수성으로 또 다른 고통과의 만남을 이루며 살도록 불림을 받았고 바로 거기에 구원이 있음을 강조한다. 구원에 이르는 고통은 생존이 아닌 삶으로 가는 길을 펼쳐준다.



영성이 묻는 안부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사나요? 이런 질문 자체가 슬프지요. 아니라면 성과 중심의 삶의 무게를 덜어놓으면 어떨까요? 우린 얼마나 더 잘 먹고 잘 입어야 하는 걸까요? 얼마나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좋은 집에서 살아야 할까요? 얼마나 더 좋은 약을 먹으면서 건강해져 오래 살아야 할까요? 얼마나 고통을 줄이고 더 편하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어둠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정화된 고통만이 진짜 행복을 만날 수 있다고 믿어요. 현대를 사는 우리는 땀을 흘리지 않고 원하는 성과를 얻기 위해 너무도 많은 좋은 가치와 의미를 희생시키지 않나요? 조금만 시간 내어 기도하거나 독서를 하고 봉사를 하면서 얻는 소소한 즐거움이야말로 결코 소소하지 않는 거대한 감동과 만족감을 줘요. 조금만 고통을 감수한다면 고통에 대한 면역력은 강화되고 평범한 일상은 마르지 않는 행복일 수 있고요. 오늘도 고통을 의미 없게 만들고 영적 성장을 막는 우리의 소소한 습관을 돌아보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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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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