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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물질 체험, 느낌으로 기억되지만 쉽게 소멸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25. 나의 기억은 안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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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질 수도 없고 맛도 향도 없는 탈사물화된 공간에서 매 순간 흥분하고 감동하고 눈물도 흘린다. 하지만 돌아서면 행동변화는 있기나 한 것일까? OSV

 


언젠가 어버이날 특집으로 한 방송사에서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적이 있다. 우리 가족은 어머니에 대한 아리고도 그리운 수많은 기억의 풍경을 어디서부터 펼쳐나가야 할지 막막했었다. 그러다가 서로가 가지고 있는 어머니의 유품을 펼쳐놓자 조각난 이야기들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면서 신기하게 퍼즐 맞추듯 이어갈 수 있었다.

“첫 월급으로 엄마에게 오팔 반지 해드렸는데 늘 끼고 다니시다가, 그만 암에 걸려 살이 빠지면서 못 끼고 보관만 하다 떠나시고 말았어.”

“한 땀 한 땀 손으로 짜준 세상에서 단 하나뿐 인 명품 스웨터, 찬바람만 불면 엄마가 더욱 그리워지네.”

“지나가다 수공예 바구니만 봐도 어릴 적 엄마가 요술처럼 바구니를 만들어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던 기억이 나.”

사물에서 흘러나오는 기억으로 우리 가족은 과거로 향한 생생한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다. 손에 잡혀 만질 수 있는 물질 경험에서 얻은 정보는 현실로 옮겨졌고, 진한 여운 덩어리가 오래도록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적셔주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현재를 바라보고 또 내일로 옮겨 나아간다. 만약 기억이 없다면 ‘현재’도 없을 것이다. ‘현재’는 과거의 모든 기억의 끝자락에 있다. 기억을 연구하는 신경과학자들은 기억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영혼과 정신에 새겨진 기록이라고 말한다. 의식조차 하지 않는 기억으로 우린 아침에 일어나 씻고, 냉장고를 열어 물을 마신다. 그리고 어딘가로 향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선택하고 행동한다. 세월이 흘러도 흔적으로 흉터로 남기도 하는 대부분의 기억들은 물질체험에서 온다. 암기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몸이 마음이 피부가 그리고 장기가 기억한다.

오가와 요코의 「은밀한 결정」이란 소설에서는 알 수 없는 힘으로 사물이 주기적으로 하나둘 사라진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기억을 잃게 된다. 사물이 사라지자 기억도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이 이야기가 지금과 맞닿은 지점이 참 많다. 우리의 세상은 기후위기로 인하여 식물과 동물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100만 종 이상이 멸종 위기에 놓여있다고 하니 이에 대한 기억도 당연히 사라질 것이다. 더욱이 우린 점점 비물질 세상으로 옮겨가고 있다. 비물질이 물질의 지형을 덮어 기억도 함께 소멸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현실 세계를 가공하여 현실처럼 만들어낸 메타버스에서의 사물체험은 진짜보다 더 강렬한 체험으로 실재에 대한 기억이 희석되기도 한다. 디지털은 마치 유령처럼, 보이긴 하는데 만질 수는 없다. VR(가상현실)로 체험하는 3차원의 디지털 이미지는 현실로 지각한다. 그런데 사물을 만져 그 질감을 감지하면서 뇌신경에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시각으로만 자극을 받는다. 사람은 본래 보는 것을 믿으려는 경향이 있어 보기만 해도 오감이 저리고 강렬한 느낌으로 흥분하고 반응한다. 이런 비물질 체험은 느낌으로 기억되지만, 또 쉽게 기억에서 소멸되기도 한다. 이런 가상체험이 우리에게 어떤 기억으로 다음 세대에게 바톤터치를 해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린 지금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만질 수도 없고 맛도 향도 없는 탈사물화된 공간에서 매 순간 흥분하고 감동하고 눈물도 흘린다. 하지만 돌아서면 행동변화는 있기나 한 것일까? 영상으로 앙상하게 남은 아사 직전 아이들의 비참한 현장을 현실처럼 지각했다고 하여 밥 한 그릇이라도 보낼 생각은 할까? 비물질 세상에서 매일 꿈을 꾸듯 살아가면서 나의 감각은 온전한 것일까? 나의 기억은 안녕한가?


영성이 묻는 안부

우리는 물질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지각해요. 그리고 그 지각에 의해 선택하고 행동하겠지요. 기억은 쌓여 연결하고 의식과 정신, 그리고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인데요. 우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죠. 보고 듣고 감각하는 모든 것은 과거의 기억에 의해 해석되니까요. 그러니 물질은 정신과 영혼의 친구이지요. 물질을 멀리하고 소유를 경계하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이긴 할 텐데요. 비물질 세상에서의 물질은 너무도 소중하네요. 보고 만질 수 있는 생명체와 사물을 벗 삼아 행복한 기억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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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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