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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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현실공간에서의 감각만이 공감 능력 부여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30. 스펙터클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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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실재와 허구의 경계가 무너진 삶을 살고 있진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사진은 허구의 미래를 그린 그림. pixabay 제공


언젠가 10대 아이들을 데리고 캄보디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태국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로 들어서는데 한 편의 흑백영화처럼 잿빛 영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뼈마디가 앙상했고 배는 볼록한 어린아이들이 자기보다 몇 배나 더 큰 물건을 이고 뒤뚱거리며 급히 걷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 눈에는 아이들이 먼저 보이는지 우리 아이들도 한숨을 내쉬며 동정 어린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주머니를 털어 도와주는 모습도 보였다. 우리 아이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을까? 미디어를 통해서만 봐왔을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국경에 직접 와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날 숙소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는데 음식을 가져와 매번 맛만 보고 버리기를 거듭하는 몇몇 아이들이 있었다. 게다가 파인애플을 먹으면서 한 입 먹더니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아이도 있었다. 이유를 물으니 파리가 앉았다는 것이다. “우리 엄마가 잘못 먹으면 말라리아 걸린대요.”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당한 대꾸에 그만 정신이 아찔했던 기억이 있다.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자연공간 속으로 들어오면서 환경을 재변형하고 실체 ‘공간’에 대한 감각이 사라졌다고 미디어비평가인 메이로비치(Joshua Meyrowitz)는 말한다.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공감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린다. 그런데 테크놀로지 세상에서 관람하고 구경하는 것으로 길들여진 감각은 순간의 동정과 연민의 감정은 느꼈을지 모르지만, 진짜 익숙한 자기만의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 ‘나도 그럴 수 있다’는 공감의 영역까지 확장되지 못한 것이다.

감각경험을 통해 뇌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감각이 공감이란 능력을 부여한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감각한다. 인지과학자들은 인간은 매우 시각적인 동물이고 약 40~60까지 뇌가 시각 정보체계에 관여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은 보는 동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그렇기에 우린 쉽게 ‘보는 것’에 빠진다. 하지만 보는 대상에서 언제나 나는 제외된다. 디지털스크린에 빠져 사는 나는 언제나 구경꾼이기 때문에 그렇다. 구경꾼에게 ‘나도 그럴 수 있다’는 공감의 힘을 기대하긴 어렵다.

스펙터클, 영어로 볼거리가 많다는 의미다. 라틴어 spectaculum, 즉 관람, 쇼에서 비롯된 말이다. 미디어를 통해 스펙터클에 익숙한 우리는 스펙터클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매일 디지털기기에 혹사당하는 우리의 눈은 세상의 재난과 전쟁이 뉴스와 영화와 게임, 사실과 허구를 오가며 소비하고 있다. 공통점은 모두 스크린을 통해서 본다는 것이고, 내가 있는 안락한 공간에서 구경하고 있다는 것이다. 리모컨을 돌리듯 공간은 이동하고 실재와 허구의 경계가 무의미해진다. 스펙터클에 빠져 화면이 바뀔 때마다 감정이 요동을 친다. 하지만 그 감정도 금방 버려지고 만다. 왜? 구경꾼이라서 그렇다.

프랑스 사회학자 기 드보르(Guy Ernest Debord)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현실 자체가 스펙터클에 의해 전도되면서 사회 전체가 물질적으로 재구성되고 기계적으로 조작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내면의 깊이나 내용보다는 보이는 외양에 집중되고 말았다고 한다. 스펙터클은 그렇게 우리의 욕구를 대체하는 상품이 되고, 끊임없이 유혹하고 지배하면서 우리도 모르게 우리는 ‘수동적 수용자’이며, 스펙터클의 노예이며, 구경꾼으로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점점 기계처럼 될 것이고, 기계는 점점 인간처럼 될 것”이라는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의 끔찍한 말도 생각난다. 테크놀로지 세상에 푹 빠져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점점 기계적인 속성을 닮아가고 있는 것일까? 테크놀로지는 모든 것이 분리 가능하며 접속과 해체, 그리고 변형이 용이하다. 우리의 가치와 신념도 하나의 생산품처럼 머리는 머리대로 가슴은 가슴대로 분리하고 해체되는 것은 아닐까? 세상은 인간과 기계의 융합이 오리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고 또 그렇게 변화되어가고 있다. 인간의 지능을 기계에 옮기고 기계가 몸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점점 더 길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



영성이 묻는 안부

인간이 얼마나 관람을 좋아하는지 하느님은 이미 알고 계셨을까요? 하느님께서 스펙터클하게 멋진 날개를 달고 나타나 마법 같은 권능을 보여주셨다면, 혹은 최고의 권력자로 혹은 비상한 학자로 그렇게 우리 앞에 나타났다면 우린 아주 쉽게 빠져들었겠지요. 구경꾼으로서요.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출근하고 돌아오면서까지 수없이 빠져드는 스크린 속 세상에는 슬프게도 나는 늘 제외됩니다. 구경꾼이니까요. 우리 아이들이 또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느린 시간을 견뎌내며 흙 속에 손을 넣어 보기도 하고, 재난 지역에서 땀을 흘리며 사람들의 아픔을 나누는 그런 실제 공간에서의 주인공 경험을 자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진짜 현실공간에서의 감각만이 공감의 능력을 부여해 줍니다. ‘나도 그럴 수 있다’, ‘나라면 그렇겠다’라는 공감의 힘, 바로 세상의 폭력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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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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