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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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존경하지 않는 아이, 다른 어른 존경할 수 있을까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32. 예의와 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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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은 서로 어떤 관계와 대화로 지내야 서로 존경과 예의의 삶을 일굴 수 있을까. 사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가족의 알현을 받으면서 아기와 인사하고 있다. OSV

 


“엄마가 자가용으로 아이를 등교시키면서 차 문까지 열어주고 손을 흔들어요. 그러면 아이는 사장님처럼 돌아보지도 않은 채 한 손만 쳐들고 학교로 들어서죠. 참 희한한 장면 아닌가요?”

한 중학교 교사가 흥분하면서 하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아이들에게 어른에 대한 예의를 운운하면 꼰대가 되는 세상”이라면서 한탄한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한때 공중화장실에 가면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문구였다. 다음에 사용할 사람을 위한 예의로 한 번 더 돌아보라는 말이다. 만약 아이가 엄마를 향해 돌아만 봤어도 최소한의 예의가 됐을 것이다. 돌아봄에서 예의가 나온다. 보고 싶어서, 사랑해서, 아쉬워서, 궁금해서, 호기심에서 다시 돌아본다. 다시 멈춰 바라보면서 마음도 뜨거워지고 존중과 배려도 생기고 예의는 덤으로 따라온다.

‘예의’와 함께 ‘존경’이란 말도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 노인과 젊은이 사이에서 존경심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옛날보다 어른들이 더 존경받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요즘 아이들이 예의가 없어서일까? 때론 존경은커녕 오히려 어른들을 경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 한창 교권과 학생 인권과의 충돌을 논하면서 학생 폭력과 학부모 갑질에 대한 이슈가 뜨겁다. 문제 해결을 위해 제도 개선은 할 수 있겠지만, 서로가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와 공감은 시스템에서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존경(respect)의 어원인 라틴어(respectus)는 ‘다시 바라보기’의 뜻을 가지고 있다. 다시 볼만한 가치가 있어 돌아본다. 예의는 존중과 존경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예의가 없다는 것은 자신 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비좁은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거리의 부재다. 너무 가까워 적정거리가 없으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면 돌아볼 수가 없다. 마치 피사체를 가까이서 한가득 담아낸 셀카 속 나처럼 온전히 자신에게만 몰입된 상태다. 피사체로부터 조금 떨어져 거리를 둔 롱샷은 상대도 주변의 배경도 함께 담아낼 수 있다. 부모 자녀 간에도 어느 정도의 적정거리가 있어야 존중감이나 존경심으로 예의를 갖추게 된다.

빛의 속도로 전 세계가 연결되면서 거리감은 사라지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경계마저 뒤섞이고 물리적인 제약도 허물어졌다. 경계가 없는 사회, 거리감이 사라진 사회는 투명을 요구하면서 폭로가 이어진다. 거리감이 사라진 디지털 세상에서는 정치권에서의 폭로, 직장이나 학교에서의 고발, 온라인을 통한 악성민원은 멈춰 돌아볼 여지도 여백도 없다.

세계가 지구촌이라는 작은 마을이 되었다. 존경하기에는 거리가 없는 사회다. 예수님께서 이르시길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고 하셨다. 수도원에서는 성인(聖人)과 함께 살기는 매우 힘들다는 말도 있다. 한 공동체에 너무 가까이 살다 보면 성인이 있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조금은 멀리 보고 다시 돌아볼 때, 예언자와 성인을 알아볼 수 있다.

부모와 자녀는 친구 같은 관계가 아니며, 모든 것을 공유하는 관계도 아니다. 다만 자녀의 발달 단계에 맞게 하나의 독립체로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울 뿐이다. 부모나 스승으로서의 권위, 어른으로서의 권위, 그리고 선배로서의 권위가 존경할 수 있는 거리를 만들어준다. 권위는 어른으로서 고단하고 가슴 아픈 책임을 이행하고 자녀가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면서 어른으로서의 권한을 아이들로부터 받게 되는 힘이다. 진정한 권위는 아래로부터 오며 진심으로 예의를 갖추고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이다. 존경하는 부모님, 존경하는 선생님, ‘존경하는…’이 아이들의 가슴에서 입으로 자연스럽게 아무 때나 늘 오르내릴 수 있는 수식어였으면 좋겠다.


영성이 묻는 안부

예의는 아이들만의 몫은 아닙니다. 아이는 부모의 행동에 의해 반응하니까요. 특히 어린아이일수록 그렇겠지요. 부모가 지나치게 희생만 한다고 해서 아이가 부모에게 고마워할까요? 자녀를 위한다고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 배려 않고 무개념으로 행동한다면 아이는 부모를 존경할까요? 학교 교사에게 “우리 아이는 그런 아이 아니라고” 하면서 교사를 비난한다면 아이는 부모를 자랑스러워할까요? 아이의 사적 공간을 존중해주지 않고 아무 때나 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거나 아이 물건을 뒤지면 아이는 그런 부모를 공경할까요? “내가 다 해 줄 테니, 넌 공부만 하면 돼”, “다, 너를 위한 거야!” 하면서 ‘사랑’이라고 강조한다면 아이 또한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까요? 아이 앞에서 배우자를 흉보고 세상을 비난하고 불평한다면 아이는 그런 부모를 신뢰할까요?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 아이, 사회에서 또 다른 어른들을 존경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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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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