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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적 음성언어에 익숙해지면 문자언어 설 자리 잃어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33. 디지털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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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세상에서의 유아적 음성언어에 익숙해지면서 의미를 읽고 해석하는 문자언어가 조금씩 설 자리를 침식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글보다는 말에 해당하는 음성언어인 TV 시청에 익숙한 삶을 살고 있다. OSV

 


말의 구사능력은 선천적일까? 학자마다 의견이 엇갈리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기는 생후 3개월부터 옹알이가 시작된다. 모음으로 발음하다가 차츰 자음을 섞어 단어를 말하고 구를 만들고 문장을 만드는 단계로 발전한다. 하지만 글은 다르다.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철저한 후천적 노력의 결과다. 말하기와 글쓰기의 능력은 서로 다른 뇌 영역을 필요로 한다. 듣기와 읽는 언어를 이해하는 뇌 영역도 나뉘어져 있다. 말을 잘한다고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잘 듣는다고 해서 잘 읽고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말과 글은 서로 마주 보고 함께 걸어나갈 때 든든한 존재의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우리는 말과 글로 존재의 집을 지으며 살아간다. 언어로 주변 세상을 규정하고 그 안에서 나의 존재를 의식하고 이해한다. 언어는 문자언어와 음성언어로 나뉘어져 있다. 음성언어는 소리, 문자언어는 기호를 통해 소통한다. 소리인 말과 기호인 글은 자기와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게 해주고 세상 속 다양한 관계 안에서 내 존재의 집을 지으며 살아가게 한다. 글은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을 말은 다양한 감정과 설득력을 지닌다. 말과 글은 감정과 생각, 공감과 논리, 설득과 통찰로 ‘인간다움’으로, 그리고 ‘어른다움’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다.

그런데 오늘의 디지털 세상에는 ‘글’보다 ‘말’이 넘치고 있다. ‘읽기’보다 ‘보는’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도 음성언어에 가깝다. 우리가 수시로 소통하는 문자메시지 역시 문자라기보다 말이다. 목소리도 표정도 없는 메신저에 등장한 이모티콘은 생생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필수 아이템이다. 그렇게 이모티콘을 주고받다 보면 유아 때 즐겨 놀았던 인형이나 애니메이션에 대한 유아적 취향이나 감성을 자극한다. 그룹 채팅을 하다 보면 언어유희에 빠지게 되고 유아적 회귀본능 역시 꿈틀거린다. “ㅋㅋ 몰러~”, “고뤠~~”, “흐미 좋아라”, “잉?”, “아항~~” 끝말을 끌면서 애교 부리는 듯한 물결표나 아이의 웃음을 연상케 하는 ‘ㅋㅋ’를 사용한다. 말을 갓 배운 아이의 말투처럼 짧고 어설픈데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움직이는 이모티콘으로 유아적인 감성을 주고받고 나도 모르게 키득키득 웃을 때가 있다. 메신저에서의 소통은 그렇게 점점 더 키덜트(kid&adult) 감성에 젖게 한다.

디지털 언어는 단순하고 쉽고 재미있다. 긴 문장이나 어른다움의 추상적 언어는 가급적 피한다. 어떤 대상에게 감동하면 “와”, “대박”이란 감탄사로 모든 감상평의 처음과 끝을 완성한다. 관조하고 성찰하면서 나오는 해석과 평가는 ‘와’란 감탄 한마디에 압도당한다. 만약 누군가 나의 작품을 보고 깊은 성찰로 이뤄낸 진지한 반응을 보였을 때와 혹은 “와!”하는 환호성에다 ‘엄지 척’까지 해준다면 난 어떤 반응에 더 기뻐할까? 후자일 것이다. 어느 유명 화가가 누군가 자기 작품을 “와!”라고만 해주길 바란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디지털 세상에서의 유아적 음성언어에 익숙해지면서 의미를 읽고 해석하는 문자언어가 조금씩 설 자리를 침식당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식당에 가면 쉽게 보는 장면이 있다. 아이들 손에 스마트폰이 들려있고 부모는 밥을 먹는다. 이렇듯 어릴 적부터 음성언어에 지나치게 노출되어 과연 진지하고 느린 문자언어 학습이 가능할지, 철저한 학습만큼 얻어내는 문해력은 과연 높일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디지털 유목민들이 글이 아닌 음성언어로만 소통하는 세상이 온다면? 참을 수 없는 가볍고 부실한 존재의 집에서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사라지고 보이는 것만 보며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저 나만의 착각이길 바랄 뿐이다.




영성이 묻는 안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바로 죽기 직전까지 자기대상의 적절한 반응을 필요로 한다”고 자기심리학의 창시자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은 말해요. 그래서일까요? 인간은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여전히 나를 인정해주고 반응해주고 공감해주는 ‘엄마’를 원하나 봅니다. 조건 없이 받아들여지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 그것은 우리의 원초적 욕망이죠. ‘어른다움’이 버거울 때, 우울하고 화가 나고 무기력해질 때 유아적 퇴행본능은 튀어나오기 마련인데요. 아이처럼 장시간 스마트폰 보고, 언어유희에 빠져 문자를 주고받는다면 당장은 피로감을 해소시켜주는 것 같지만, 내면의 아이는 성장하지 않겠지요. 부모도 아이도 똑같이 ‘읽기’보다 ‘보기’만을 반복한다면 아이는 언제 ‘존재의 집’ 기초공사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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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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