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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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결 시대, 각자는 격리된 유리 상자에서 생활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36. 고립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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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초연결 시대를 살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실제 세상에서는 서로를 소외시키고 단절되어 각자는 격리된 유리 상자에서 살아가고 있다. pixabay 제공

 

 


“청년들이 생각보다 고민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최근에 리스본 세계청년대회에 다녀온 사제의 말이다. 부모에게도 친구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다면서 처음 본 사제에게 이런저런 고민을 이야기하더란다. 그러면서 ‘한번 보고 다시 보지 않을 사람이라 더 편하게 속내를 말할 수 있다’는 씁쓸한 뒷말까지 남기면서 말이다.

실제로 여러 조사결과에 의하면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다’는 청년들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부모도 친구도 신뢰하지 못해서일까? 친구마저 경쟁 상대이고 부모는 충분한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해서일까? 고민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은 고립된 상태에 있음이다. 위험한 순간에도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다면 외로움은 사무치게 엄습해 올 것이고 장기화되면 결국 극단적인 상황까지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초연결 시대, 역설적이게도 우리 각자는 격리된 유리 상자에서 살아가는 것 같다. 가상세상과의 연결로 실제 세상에서는 서로를 소외시키고 단절되어 산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순간에도 스마트폰을 만지고, 유튜브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불편해 하고, 전화를 하면 문자로 하라고 한다. 갈수록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이 점점 멀어지면서 낯설고 불편해지는 것 같다. 그러는 사이 기계는 단순히 사용하는 도구를 넘어 의존이 되고 중독이 되어 또 하나의 절대적인 신흥종교가 되어간다. 그래서일까? 외로우면 사람과 소통하기보다 기계와 시간을 보낸다. 태어나면서부터 기계와 소통하며 살아온 디지털 세대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고립의 시대(The Lonely Century)」의 저자이며 경제학자인 노리나 허츠(Noreena Hertz)는 ‘잔인한 경쟁적 사고방식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가 우리를 고립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요즘 점점 사회적으로 고립되어가는 청년들이 늘어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타인과 비교하고 열등감에 빠지고 스스로 대인관계를 끊기도 한다. 경쟁사회에서 사람은 성과를 뽑아내는 하나의 ‘자원’이다. 그렇기에 빠르고 강력한 현대기술에 첩첩이 둘러싸여 끊임없이 자신을 다그친다.

성과를 높이는 최종 종착지만을 바라보느라 ‘현재’라는 시간도 잊고 산다. 동료와 경쟁하고 또 어제의 나와도 경쟁한다. 인공지능과는 협력하고 공존하면서 사람과는 경쟁하고 배제한다. 소수의 성공한 타자와 비교하면서 자신을 열등하게 규정하고 스스로를 사회적 고립으로 몰아넣는다.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편안한 세상인 것 같지만 외로움에 병들어 고립의 섬에서 마음의 통증을 앓는다. 외로울수록 행복은 멀어지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은 부정적이기 마련이다.

하버드대가 75년간 연구한 유명한 ‘행복의 비밀’에 대한 보고서에 의하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의 좋은 관계’라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이 연구에서 충분히 우리 스스로 행복을 찾을 수 있는데 그 행복은 바로 사람에게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동으로 문이 열리고 가는 곳마다 키오스크가 설치되어 점점 사람과 멀어지고 기계와는 가까워지고 있다. 접촉은 줄고 접속은 늘어간다. 접촉은 불편하고 접속은 편하다. 접촉은 낯설고 접속은 익숙하다. 그러면서 고립되는 사람은 점점 늘어만 가는 양상이다.

노리나 허츠는 이런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명 사회적 시스템에 문제는 있긴 하지만 그럴수록 접촉하려는 ‘개인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그는 ‘하다못해 비스킷 한 조각이라도 나눠 먹으면서 휴대전화를 멀리하고 동료와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고 조언한다.

덜 외로워지려면 더 많이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외로움을 혼자 보내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결국 고립의 울타리는 더 높아질 것이다. 그럴수록 행복은 또 멀어질 수밖에 없다.


영성이 묻는 안부

언젠가 스마트폰에 담긴 지인들의 이름을 분류한 적이 있습니다. 몇 년 동안 연락 한번 하지 않는 이름, 일 년에 한 번 축일이나 생일만 문자로 주고받는 이름, 필요에 의해서만 연락하는 이름, 그 필요의 유효기간이 끝난 이름, 그리고 현재의 일로 자주 연락하는 현재진행형인 이름. 그렇게 정리하고 보니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은 그냥 ‘아는 관계’였지요. 순간 내가 잘살고 있는지 성찰하게 되더라고요. 우리는 SNS에서 열심히 답글을 달고, 정보를 주고받고, 리트윗으로 소문을 퍼뜨리면서 거미줄처럼 퍼진 인맥으로 존재감을 거듭 확인하기도 하는데요. 아마 우리가 이토록 관계를 욕망하는 것은 사랑을 하고 싶고 또 받고 싶어서겠지요. 그런데 온라인에서의 인간관계는 오프라인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온라인에서의 만남은 친하다는 느낌은 들지만 금방 잊게 돼요. 사람을 만나지 않고 접속만 하게 되면 그냥 ‘아는 사람’ 정도로 남겠죠. 한번 스마트폰에 담긴 사람들의 이름을 분류해 보면서 질문해요. “내가 힘들 때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잊고 있던 사람에게 전화해서 만나요. 어색하다고요? 새로움은 늘 낯설고 불편한데요. 행복은 불편함을 뚫고 조건과 대가 없는 관계에서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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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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