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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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있어야 할 그 자리,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때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37. 고향 상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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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고향을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들은 무엇을 추구하며,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OSV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 행복해요.”

창가에 바짝 붙어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서 L은 조용히 되뇌었다. 그 말은 신선했고 경이롭기까지 했다. 내면이 고요하면 외부의 소란함도 그림처럼 평화롭고 아늑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어떤 이유나 조건 없이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많은 순간 행복하기 위해 실리를 따지고 끊임없이 나의 위치를 점검하고 타자와 비교하는 전투적인 일상을 살아간다. 그럴수록 감정은 수시로 요동치고 고요함에서 멀어진다. 어쩌면 진정한 행복은 고요함에서 드러나는지도 모를 일이다.

매일 흘러나오는 사건·사고 뉴스만 보게 되면 디스토피아를 연상하게 된다. 최악의 지진, 최악의 참사, 최악의 자연재해, 최악의 인명피해. 요즘 ‘최악’이라는 수식어가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생태계는 무너지고, 세계 지도자들은 한순간에 지구를 무너뜨릴 무기를 만들고 거래한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처럼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광기”인 것일까? 그는 또 “세계는 황폐해졌고, 신들은 떠나버렸으며, 대지는 파괴되고, 인간들은 정체성과 인격을 상실한 채 대중의 일원으로 전락해버린 시대”, 바로 ‘고향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고향’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유목민처럼 떠돌며 살아도 마음 깊이 그리움으로 남는 곳이 고향이다. 고향은 엄마의 품이고 사랑이다. 순수한 어린 시절의 터이고 가족의 숨결이 머무는 곳이다. 그렇기에 평화롭고 아늑하고 따뜻하다. 엄마의 자궁처럼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근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고향을 잃어가고 있다. 수시로 이사 가고 부모를 도시로 모셔오기도 하고, 여행은 해외로 떠나고 딱히 명절이 되어도 가야 할 고향이 없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고향을 찾아가도 하이데거의 표현처럼 “대지는 파괴되고” 상가와 아파트 단지로 가득 들어차고 어린 시절 순수함을 떠올리는 그 자리는 황폐해졌고 함께했던 이웃도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더 편해지고 더 행복해지려는 인간의 욕망이 낳은 기술 문명은 경제 양극화로 경쟁사회가 되고, 소외와 배제로 외로움과 고립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행복은 점점 더 멀어지는 모양새다.

기술 문명의 발달로 편하게 주인처럼 사는 것 같지만, 오히려 더 분주하고 때론 노예처럼 노동하며 살아간다. 어느 때보다 더 치열하게 달려야 하는 세상이다. 더 많이 벌어 성공해서 더 많은 소비를 욕망한다. 돈을 버는 대로 소비하면서 현재를 즐기는 욜로족(You Only Live Once)과 극단적 절약으로 일찍 은퇴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파이어족(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모두의 공통점은 행복을 위해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현재를 즐기는 욜로족이나 내일을 즐기려는 파이어족 모두 경제적 여유를 얻어 더 안락한 삶을 즐기는 것, 그것이 행복이라 믿는다. 그렇기 위해서는 지독하고 처절한 노동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스스로가 성과를 뽑아내는 ‘자원’이 돼야 한다.

올터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1932년 유토피아를 그린 디스토피아 예언서와 같은 고전문학이다. 신세계는 늙지도 않고 불행도 없는 유토피아 세상이다. 인간은 공장에서 부화되고 지능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며 계급과 진로가 결정된다. 태아 시절부터 수면교육을 통해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는 주입을 받는다. 그렇기에 어떤 갈등도 저항도 없다. 조금이라도 우울하고 힘들면 부작용 없는 ‘소마’라는 환각제 하나만 먹으면 된다. 복용 즉시 행복과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기에 불행하다는 기분도 없다.

그 어떤 불편함도 허락하지 않는 완벽한 문명사회다. 그런데 이런 유토피아를 거부하는 소설 속의 존은 이렇게 외친다. “난 안락함을 원치 않아요, 난 불편함을 원합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선과 자유를 원하고 죄를 원합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원합니다.” 과학 기술로 불편함과 고통을 제거하고 쾌락과 향락의 기분만을 유지하고 죽지 않는 유토피아를 원치 않는다는 선언이다. 한마디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외침이다.

우리 미래를 예언하는 소름 돋는 이야기다. 소설 속 존의 저항은 우리에게 큰 울림이 된다. 인간다움을 복원해주는 ‘고향’을 찾아 떠나야 할 시점이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환영받고 사랑받는 엄마의 품처럼 따뜻한 ‘고향’으로.


영성이 묻는 안부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어요.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지요.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고 낮과 밤을 가르시고, 물에는 생물이 하늘엔 새들이 땅 위엔 생물과 짐승들까지 만드셨어요. 보시니 또 얼마나 좋으셨을까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당신 닮은 인간을 보셨을 때는 또 얼마나 좋으셨겠어요. 하느님이 보시기에 왜 그토록 좋으셨을까요?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존재하도록 만드시면서 존재 자체로 행복하게 해주셨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알아보고 경험하는 거룩한 행복까지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으로 보시기에 좋은 대지를 파괴하고 하느님의 존재까지 망각하고 테크놀로지 신에게 종속되어 행복하다는 착각으로 살기도 합니다. 원래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의 고향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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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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