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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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깨어 의식((意識))하지 않으면 의식(儀式)은 습관일 뿐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45. 리추얼(ritual,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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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儀式, ritual)은 매 순간 깨어있음, 즉 깊은 의식(意識) 없이 습관처럼 참여한다면 영적이고 정서적 교감이 없는 하나의 루틴이 되고 만다. 발씻김 예식이 진행되는 모습. OSV


언젠가 수녀원에서 마당을 정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몇몇 나무를 정리해야 했다. 그때 유치원 교사인 한 수녀는 어린이들과 함께 나무와의 고별식을 거행했다. 아이들은 한 명씩 나와 나무에게 이별 인사를 하면서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동안 고마웠고 미안했고 수고했다는 아이들만의 언어로 이별 의식을 치렀다. 어쩌면 그저 지나칠 수도 있고 잘려나가는 대로 무심하게 바라보는 나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특정 의식(儀式, ritual)을 통해 아이들은 나무가 세상의 일부이고 자신들도 그 나무와 연결된 세상에서 살고 있으며 무엇보다 초월자인 하느님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意識, consciousness)하게 해주었다. 아이들은 나무나 사물은 함부로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신과 모든 사물은 연결되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이런 감성을 지닌 아이들이 이대로 잘 자라주기만 한다면 적어도 사람을 함부로 대하거나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있다.

리추얼의 어원은 ‘종교적 의식과 거룩한 관습’을 의미하는 라틴어 ‘ritus’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상징적 의미를 지닌 규정된 행위를 반복하면서 안정감과 평안함을 맛본다. 리추얼은 황급히 흘러가는 시간을 멈춰 세우고 과거와 현재를 만나게 하고 현재와 미래를 서로 바라보게 한다. 리추얼은 의식(儀式)의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사물 안에 의미와 가치를 깃들게 해주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물질과 정신을 만나게 하면서 높은 차원의 의식(意識)에 도달하게 해준다.

그런데 디지털 문화 속에 푹 빠져 사는 현대인에게 리추얼의 형식과 반복은 참으로 지루하고 공허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리추얼은 새로운 것도 없고 시간은 참으로 느리다. 하지만 디지털의 시간은 변화무쌍하고 빠르고 늘 새롭다. 찰나의 순간에도 쌓이는 데이터와 정보는 스쳐 지나간다. 너무 빨라 내 마음 어디에도 거주하지는 않는다. 디지털은 가치와 상징의 결핍으로 산만하기까지 하다. 늘 새롭고 역동적이어서 수동적인 사용자가 된다. 하지만 리추얼은 상징을 읽고 의미를 부여하고 ‘깨어있음’의 높은 의식의 차원까지 끌어올리는 능동적인 몰입이 요구된다. 그렇기에 깨어 의식(意識)하면서 의식(儀式)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저 습관이고 루틴일 뿐이다. 수녀인 나는 매일 미사와 성무일도 묵상 기도라는 리추얼로 종교적 목적에 이르고 신앙고백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儀式, ritual)은 매 순간 깨어있음, 즉 깊은 의식(意識) 없이 습관처럼 참여한다면 영적이고 정서적 교감이 없는 하나의 루틴이 되고 만다.

디지털은 마치 일회용 물품과 참 많이도 닮았다. 늘 새것이고 지속적인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덧없고 공허한 일회용 물품은 마구잡이로 소비된다. 값싸고 간편하다는 이유로 필요할 때 한 번 쓰고 버린다. 무작위로 사용하고 버리면서 인스턴트 문화에 중독되어 버린다. 딱 한 번 쓰는 일회용품에 애정이라는 정서적 교류도 없다. 일회용품은 단순히 기후위기 차원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편안한 본능에 충실한 반복적인 행위는 습관이 되고 루틴이 되어 중독에 이른다. 인스턴트 문화에서는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영적 교류를 하는 리추얼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소비하고 소모하는 인스턴트식 생활 방식은 곧 내가 되고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시간을 압류한 디지털과 효율성이란 덫에 걸린 일회용품과의 조합으로 우리의 시간은 더 공허해지고 덧없이 흘러가는 것 같다.

편리하고 빠르게 소모하고 소비하는 인스턴트 문화의 생활 방식은 똑같이 반복되는 관습에 따른 리추얼을 낯설고 지루하게 만든다. 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과의 애정없는 교류는 사물과 단절하고 편리함을 위한 효율성으로 천천히 연대하며 함께해야 할 공동체와도 멀어져 가게 한다. 십자성호를 긋고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일상의 의식 안에서 시간을 멈춰 세우는 훈련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묵주를 부드럽게 쥐고 돌리는 행위에서 장엄한 리추얼은 시작되고, 나와 세상과 하느님을 연결해주는 채널이 켜지고 통로가 열린다.



영성이 묻는 안부

요즘 부쩍 ‘리추얼’이란 말이 또 하나의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데요. 누구는 리추얼을 ‘나를 지키는 습관’이라 하고, 또 누구는 ‘자아를 성장시키고 행복하게 해주는 반복적 행위’라고도 해요. 리추얼의 본래 의미가 ‘하느님께로 가는 반복적 행위’인데 ‘나에게 가는 반복적 루틴’이란 개념으로 변화된 것 같습니다.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고 내가 삶의 주인이 되는 것, 그리하여 현대는 나를 위해 시간과 마음을 주고 거기에서 위로를 받고 힐링하는 루틴을 하면서 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 되어가고 있지요. 그런데 루틴과 리추얼의 차이는 큰 것 같습니다. 매일 반복하고 있는 행위는 같은데요. 루틴은 오로지 ‘나’만 존재하지요. 그러나 리추얼은 나와 사물과 자연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존재합니다. 공동체 없는 리추얼, 의식(儀式)이 없는 의식(意識)은 루틴일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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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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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이 주님을 경외하기를 바라오. 명심하여 일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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