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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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61. 유명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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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든 나약함과 수치심을 외롭게 홀로 감당하신 곳, 바로 ‘십자가’다. 죽을 것 같은 수치심과 두려움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죽음을 이겨내신 곳이다. 미국의 신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구현하고 있다. OSV

유명해지면 수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고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심리적 보상을 얻게 된다. 유명해지면 물질적 보상도 함께 따라온다. 연예인의 방송 출연료나, 시인이나 인문학 강사의 강사료도 인지도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끔 텔레비전 오디션에 나온 사람들의 간절한 소원을 들을 때가 있다. “유명해지고 싶어요.” “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그런데 유명해지면서 얻은 큰 인지도에는 그만큼 큰 책임이 따른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세금이 ‘유명세’다. 금전적인 세금은 수치화된 금액만큼만 내면 된다. 하지만 ‘유명세’는 자그마한 실수에도 예측할 수 없는 세금폭탄을 맞는다. 일거수일투족이 이슈화되고 수많은 시선으로 단죄와 비난을 받기도 한다. 구경꾼인 대중은 유명인을 열렬히 지지하고 환호하지만, 한순간 공격이나 독설로 악플러가 되기도 하고 선동하는 사이버 테러리스트가 된다. 유명세 중에도 가장 비싸게 대가를 치르는 감정은 ‘수치심’이다. 융 심리학자들은 수치심을 ‘영혼의 늪지대’라고 한다. 이 늪에 빠지면 스스로에 대한 무가치감과 무력감으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는 무서운 감정이다.

길을 가다 넘어진 적이 있다. 속치마가 훤히 드러났다. 너무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만약 보는 사람이 없다면 대수롭지 않게 털고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넘어진 나를 구경하고 있다면 무릎이 깨지고 피가 나와도 우선은 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수치심은 타자의 시선에 의한 사회적 감정이다. 어떤 이유건 망가진 나의 모습이 구경꾼에게 노출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수치심은 나 자신이 참으로 작고 보잘것없이 느껴지는 감정이다. 나란 사람의 존재가 평가절하되어 자기애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우리의 예수님은 어떠하셨을까? 수치심이라는 표현조차 부족할 정도의 역대 최고 수준의 수치심을 겪으신 분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지금의 아이돌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등장한다. 군중은 현대 유명인사들이 밟는 레드카펫처럼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깔고 종려나무를 흔들며 환호한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온 도성이 술렁거리며 즐거운 함성을 보낸다.

하지만 슈퍼스타 예수님은 한순간 군중들의 비난과 조롱거리가 되고 만다. 빌라도 앞에 끌려가 신문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들은 예수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찌검을 하면서 조롱한다.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제자마저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도망가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하면서 예수님께 뼈아픈 상처를 남긴다. 예수님은 알몸으로 군중 앞에 서서 매질을 당하고 가시관까지 쓰는 모욕을 당한다. 병을 고쳐주고, 하느님 말씀으로 위로해주고, 아파해주고, 함께 울어주었던 사람들이 어느새 예수님을 조롱하는 구경꾼이 되어 외친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라면 어떠했을까? 상상만 해도 몸이 저리는 수치심에 숨이 막힌다. 모욕감·모멸감·부끄러움·분노가 올라온다. 나였다면 그저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이 길을 자처하고 십자가를 끌어안으신다. 게다가 우리에게도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라고 명하신다. 일 년에 한 번도 아닌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다.

수치의 상징인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다. 그러나 사실 수치심은 마주하고 나약함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치유된다. 우리의 모든 나약함과 수치심을 외롭게 홀로 감당하신 곳, 바로 ‘십자가’다. 죽을 것 같은 수치심과 두려움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죽음을 이겨내신 곳이다. 수치의 또 다른 상징인 ‘알몸’으로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지만, 영광스럽게 ‘찬란하고 눈부시고 눈처럼 흰옷’을 입고 나타나신다. 빛나는 부활의 옷을 입고.


영성이 묻는 안부

유명인은 대중의 관심이나 흥미를 충족시켜야 하는 언론에 의해 사적인 영역까지 노출됩니다. 그들의 일상은 대중의 소비대상이 되지요. 대중은 구경꾼이니까요. 나를 지지하고 좋아했던 사람들이 나의 은밀하고도 부끄러운 사적 영역까지 벌거벗기고 구경하면서 손가락질하고 비난을 보내올 때 누구라도 사라지고 싶은 수치심을 느낄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유명한 슈퍼스타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발이 밟힐 정도로 무리를 지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다 상황이 바뀌자 구경꾼인 군중은 돌아섭니다. 군중은 자기 자신을 위해 누군가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이니까요. 물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도 예수님을 배신하지요. 인간 예수님은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웠을까요? 알몸으로 대중들의 조롱을 받으면서 또 얼마나 수치심과 모욕감에 슬퍼하셨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숨지 않으셨습니다. 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원죄로 인해 하느님 은총의 옷을 거둬들인 알몸에 대한 우리의 수치심을 예수님 홀로 온전히 끌어안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신 이 길을 따르라고 오늘도 우리에게 손짓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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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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