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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4. 성녀 데레사는 누구인가<하>

16세기 교회에 영적 비전 제시한 선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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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녀 데레사가 설립한 첫 번째 맨발 가르멜 수녀원인 아빌라의 성 요셉 수녀원.

 영적 여정에 진일보하다

 1553년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한 후 성녀는 20여 년 간 가르멜 수도자로서 정진했습니다. 특히 성녀의 기도생활에 도움을 준 것은 프란치스코의 오수나가 쓴 「제삼 기도 초보」였습니다. 그런 성녀의 영적 여정에 전환점이 된 사건은 1554년 사순절에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에 대한 깊은 체험이었습니다. 수녀원 안에 있는 기둥에 묶여 고통 받으시는 예수님 동상을 바라보며 성녀는 인간을 향한 아니 자신을 향한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을 깨우치며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분을 향해 일대 회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회심의 여정에 결정적인 방점을 찍은 것은 그로부터 2년 후 예수회의 프라다노스 신부님과 영적 대화를 나눈 후 기도할 때였습니다. 당시 성녀가 고민했던 것은 과연 사람들과의 우정이 하느님과의 관계에 방해가 되는가 하는 점이었는데 젊은 시절 이 문제로 고심한 바 있던 성녀는 아직껏 인간적인 우정에 연연해하는 마음을 끊지 못했고 프라다노스 신부는 그런 데레사를 설득하다 지쳐 성녀에게 경당에 가서 성령송가 를 바치게 했습니다. 그 권고에 따라 기도를 바치던 도중 성녀는 특별한 신비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 처음으로 신비적인 황홀경을 체험함과 동시에 주님의 신비적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성녀는 영적으로 큰 걸음을 걸으며 진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성녀가 받은 이 은총은 영적 약혼 으로 불리는데 이때부터 성녀는 하느님에 대한 더욱 많은 신비체험을 하게 됩니다.
 
 남녀 맨발 가르멜의 설립자
 이런 일련의 신비체험을 통해 성녀는 자신을 향한 그리고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고 이제 그 사랑에 응답하고자 하는 원의를 키워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성녀는 기존의 가르멜 수녀원이 가진 해이한 수도생활 분위기를 일신함과 동시에 교회를 위해 세상을 위해 여인으로서 할 수 있는 당시의 한계 내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성녀는 엄격한 봉쇄 수녀원을 창설해 온전한 관상생활에 전념함과 동시에 철저한 고행과 기도의 삶을 통해 개신교의 분열로 인해 홍역을 앓고 있던 교회에 힘을 불어넣어 주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녀는 1562년 아빌라에 첫 번째 맨발 가르멜 수녀원을 창립하고 그 후 죽기까지 20년 동안 스페인 전역에 17개의 수녀원을 설립했습니다. 또한 가르멜 수녀들의 이상을 함께 공유하며 동시에 그런 영적 카리스마를 사도직을 통해 실제로 교회 안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남자 수도회를 창립했습니다. 1568년 메디나 델 캄포에서 인연을 맺은 십자가의 성 요한과의 만남은 이런 이상을 구체화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영성 저술가
 1572년 성녀는 자신의 친정이라고 할 수 있는 아빌라의 강생 수녀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커다란 은총을 받게 됩니다. 이를 소위 영적 결혼 의 은총이라고 하는데 이는 앞서 말한 영적 약혼 에 뒤이은 영적 단계로서 인간이 현세에서 도달할 수 있는 영적 여정의 최고봉을 의미합니다. 성녀는 1560년대 초반부터 수녀원 창립활동을 함과 동시에 그동안 자신이 받은 영적 은혜와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글로 소개함으로써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기도 여정에 동참하고 그럼으로써 자신과 같은 은혜를 받게 되길 고대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쓰게 된 첫 번째 작품이 한국어로 「천주 자비의 글」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자서전」입니다. 또한 성녀는 자신의 첫 번째 제자 그룹인 아빌라의 성 요셉 가르멜 수녀원 수녀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기 위해 「완덕의 길」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미 영적으로 완숙기에 접어든 1577년 「영혼의 성」을 썼는데 이 작품은 성녀의 영성생활과 기도생활을 집대성한 걸작으로 꼽힙니다. 그밖에도 성녀는 다양한 소품들을 많이 집필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에는 금기시 되던 「아가서」를 묵상하고 해설하기도 했고 자신의 신비체험을 시에 담아 표현하기도 했는가 하면 영적 지도자나 자신을 심문했던 종교 재판소의 재판관들에게 자신의 영적 상태와 그간 자신이 걸어온 영적 여정에 대해 설명한 일련의 「영적 보고서」들도 작성했습니다.
 
 교회의 딸
 20세기 중반에 활동하던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대표적 영성가인 프랑스 가르멜의 마리 에우젠 신부는 가르멜의 주요 성인들의 가르침을 집대성하는 가운데 가르멜 영성이 무엇인지 종합적으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나는 하느님 뵙기를 원합니다」이며 후반부는 「나는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합니다. 이 두 제목은 가르멜 영성이라고 하는 가톨릭교회의 거대한 영적 산맥의 시조(始祖)인 성녀 데레사의 영성을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죽기까지 성녀가 그토록 열망했던 것은 하느님을 뵙는 것이었습니다. 진리 자체이자 궁극적 사랑이신 하느님 그분을 뵙는 것이야말로 성녀의 지상 과제였습니다. 이는 교회 역사상 수많은 성인성녀들을 비롯해 신학자들이 가르쳐 온 인간의 궁극적 소명인 지복직관(至福直觀)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녀는 1582년 알바데토르메스 가르멜 수녀원에서 임종하면서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성녀가 살던 16세기는 유럽 전역에 가톨릭교회가 큰 위기를 겪고 있던 상황입니다. 그 난세에 성녀는 여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선택해 교회에 영적인 힘을 불어넣어줌으로써 내적인 쇄신을 이끌었습니다. 성녀는 수많은 신비체험을 하면서 언제나 그 체험이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한지 염려했고 영적 지도자들의 지도를 따르며 그들을 통한 교회의 인도에 철저히 순명했습니다.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을 쓰면서도 단 한 줄의 글조차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불살라 버리겠다는 각오로 임했습니다. 성녀는 죽을 때까지 온전히 교회의 딸이었고 교회를 위해 일생을 불살랐습니다. 수많은 이단이 판을 치던 16세기 성녀 데레사는 시대의 징표를 읽고 교회에 영적 비전을 제시한 선각자였습니다.
▲ 윤주현 신부(맨발 가르멜 수도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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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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