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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자 수녀의 하느님의 자취 안에서] 2. “걷다 보니 어느새 길이 되어 있었다”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 조경자(마리 가르멜, 노틀담수녀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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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수녀회 관구장 수녀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말씀인즉슨 앞으로의 사도직으로 ‘생태영성을 농촌에 들어가 살아가는 것은 어떨까?’라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에게 ‘생태’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들’, 그중에서도 ‘어린이’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민 없이 “저를 가난한 아이들에게로 보내주세요”라고 청하였다. 그런데 이어진 수녀님의 말씀은 내 생각을 돌려놓으시기에 충분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제 우리에게 가난한 대상이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해요. 앞으로 우리 공동체 모든 수녀님이 그렇게 살아야 하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사도직이 될 거로 생각해요.” 나는 약간의 준비시간을 갖고 2010년에 강화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강화도는 섬이라 그런지 안개가 자주 낀다. 내 기억에 2010년에는 유난히 안개가 많이 꼈다. 안개는 마치 내 현실을 반영해주는 듯, 앞을 내다보기 어렵게 꽉 차서 침묵의 시간을 만들어줬다. 먼저 걸어간 이를 따르는 길이 아니라,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걷는 그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맞이했다. 솔직히 오래갈 수 없을 것 같은 길을 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늘 ‘주님, 당신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라고 기도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문득 깨닫게 되었다. 안갯속을 걸으며 길의 끝을 보는 것은 어렵지만, 적어도 나아갈 수 있는 한 발자국만큼은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발자국 나아가면 다음 나아갈 만큼 한 발자국이 보였다. 마음속에서 “아, 이거구나!”라는 탄성이 나왔다. 내게 요청이 되는 것은, 발 딛는 곳이 바로 길이라는 믿음과 나아갈 다음 한 발자국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길이 되어 있었다. 살다 보니 어느새 터전이 되어 있었다. 한 발자국, 하루, 한 해가 지나 벌써 11년이 되었다. 호미로 숱하게 검지를 찍을 만큼 밭에서 일하고도 나는 흙을 알아보는 데에 1년이나 걸렸다. 흙이 참으로 흙으로 보이는 순간부터 이전의 흙과 이후의 흙이 다르게 다가왔다. “아, 네가 흙이구나!” 그동안은 이용가치로 보는 흙이었다면, 이제 이 흙은 하느님의 자취가 숨 쉬는 그 흙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하느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것을 알게 된 날처럼 행복했다. 나는 흙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살면서 막막했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고, 또 부지런히 거두면서, 또 해마다 새로운 날씨 속에 적응해가면서 나는 아이를 키우는 마음이 되었다. 땅과 함께 애끓는 마음이 되어 기다리고, 배우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마음을 공동체로서 함께 나누고 아파하고 함께 쓸어주며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 큰 힘이 되어준다. “자연 앞에서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항상 겸손되이 어른들께 물어가며 가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많은 순간 곱씹고 곱씹었다.

앞서가는 이 없이 길을 갈 때에는 그 길이 정말 외롭고 어렵게 다가올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가고 있는 그 길이 아닐 때는 더더욱 그렇다. 나도 막막한 안갯속을 걸으며, 내딛는 한 걸음에도 가슴 졸였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길이 있다는 확신을 얻으며, 그 어떤 막막함 속에서도 길을 걷게 되었다. 그 길은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 조경자(마리 가르멜, 노틀담수녀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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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1-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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