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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직 현장에서] 웃음 짓는 예수님은 왜 이리 적을까?

권철호 신부(서울대교구 당고개순교성지준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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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신앙의 해`와 `순례길 선포` 이후 성지를 찾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분들이 오셨고, 그만큼의 예측할 수 없는 물음들에 답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밑도 끝도 없이 한 순례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부님 왜 많은 성화 중에 예수님이나 성모님이 환하게 웃는 것들이 적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순간 조금 당황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고통받는 예수님의 모습이나 성모님 성화는 흔하지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적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가까운 곳에 그런 성화는 흔치 않습니다. 그윽한 미소를 간직한 예수님과 성모님은 간혹 있지만, 그것조차 연민을 담고 있는 모습이고 보면 예수님에게서 떠오르는 모습은 고통과 연민을 간직한 성화가 압도적입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웃는 예수님의 얼굴을 떠올리기는 어려웠습니다.

 영화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대사는 이런 뜻에서 의미심장합니다.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는 진리, 그것이 악마다"라는 주인공 말처럼 미소를 모르는 신앙과 의혹의 여지가 없는 진리는 때때로 완벽을 가장한 악마의 속삭임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주인공은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사람들을 조심해라. 그들은 대체로 많은 사람들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만드는 법"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습니다. 이는 사람이 되신 예수님에게서 웃음과 미소를 빼버리려는 치명적인 함정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웃지 않았다거나 미소를 잃어버렸다고 상상한다면 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 미소를 잃지 않았고 웃음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 계셨던 성인들의 일화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2세기에 순교한 라우렌시오 성인은 뜨거운 석쇠 위에서 순교하셨는데, 그는 "이쪽은 다 구워졌으니 다른 쪽도 구워주시오"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주님 저를 정결하게 하소서.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그리하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 안에서 유머나 웃음은 이처럼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질식당하지 않는 여유를 간직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환하게 웃음 짓는 예수님을 상상하지 못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절박하게 되어서야 늘 예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웃지 않거나 미소를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힘겨워하는 인간에게 환하게 웃는 예수님은 오히려 낯설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웃는 예수님을 많이 만났으면 합니다. 미소 짓는 예수님과 친했으면 합니다. 힘겨울 때만이 아닌 즐겁고 신날 때에도 예수님을 많이 찾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도 여러분을 그렇게 환한 미소로 맞이하실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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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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