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말씀묵상] 주님 성탄 대축일 / 낮 미사 - 은혜로운 아기 예수님의 탄생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성탄의 신비를 묵상하며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하다가 갓 태어난 시골 강아지들을 만났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눈에서 뗄 수 없었습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해맑은 눈빛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고운 털에,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아무리 보고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한참 동안 녀석들을 바라보면서 제 머릿속에 한 가지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강아지를 예뻐하고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걸로 그치고 말지, 정말로 강아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즘 천만 반려견 시대라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애지중지, 마치 친자식처럼 반려견들을 양육합니다. 그러나 반려견이 아무리 사랑스럽다 할지라도,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반려견이 되고 싶은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던지, 우리 인간이 얼마나 가련하고 측은했던지, 하느님께서 자신의 처지를 버리고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신 충격적인 대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육화 강생 사건, 아기 예수의 탄생인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으로 태어나심. 이것은 정말 보통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있을 수 없는 너무나 뜻밖의 일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순위를 꼽자면 당연히 첫 번째로 뽑힐 사건입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합니다.

성탄은 참으로 놀라운 대사건입니다.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너무나 큰 사건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큰 사랑 앞에 우리는 입을 크게 벌리고 경탄과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나이에 중병에 걸려 꽃피어나지도 못하고 시름시름 시들어가는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언젠가 한 소아병동을 방문했을 때,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어린이 환자를 만났는데, 안타깝게도 오랜 투병 생활에도 호전의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고, 부모는 속수무책으로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겠지요. ‘나는 살 만큼 살았으니, 차라리 나를 데려가셨으면.’ ‘차라리 내가 저 아이였으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위엄과 영예, 존엄성을 포기하시고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강생하신 이유도 동일합니다. 우리 인간의 처지가 얼마나 가련하던지,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이 얼마나 안쓰러웠으면, 우리 인간들이 한계에 부딪혀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하느님께서도 이런 생각이 드셨을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저들의 고통을 대신 겪었으면, 차라리 내가 저들의 십자가를 대신 졌으면, 내가 저들과 똑같은 모습을 취했으면.’ 이것이 바로 예수님 성탄의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으로 들어오신 이유입니다.

성탄의 신비 앞에 감사와 찬미를

또 다시 성탄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처지를 버리시고 작은 갓난아기가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수많은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성탄의 신비를 이해해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그 누구도 손에 잡힐 듯이 명쾌한 설명을 내어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성탄은 신비롭고 특별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처지를 보신 하느님이셨습니다. 배신과 타락, 우상숭배와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당신 백성들의 모습에 피눈물까지 흘리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하신 일이 숱한 예언자들을 보내고 착한 목자들을 보내셔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완고해질 대로 완고해진 백성들, 눈과 귀가 먼 백성들이 끝까지 듣지를 않았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뜻밖의 결정을 하셨습니다. 하느님 당신이 당신의 처지를 버리시고 사람이 되시겠다고, 키 높이와 눈높이를 완전히 낮춰 인간과 마주 보고 대화를 하시겠다고…. 이런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측은지심의 결과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아닐까요?

생각할수록 은혜로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의 표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놀라운 사랑의 대사건 앞에 백 번 천 번도 더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꾸며낸 이야기나 전설이 아니라 진리요 역사적 사실임을 굳게 믿어야겠습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선물을 가져다주는 산타클로스나 먹고 마시며 즐기는 우리가 아니라 오직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신 아기 예수님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비록 갓난아기로 오신 예수님이지만 그분은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하느님 바로 그분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성탄절은 흥청망청 자본주의와 상업주의가 판을 치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희생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모습으로, 가장 크신 분이 가장 작은 모습으로 육화하셨습니다. 가장 귀한 분이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결핍도 아기 예수님 탄생 때의 결핍과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때로 결핍은 우리 인간을 고통의 끝으로 몰고 갑니다. 뿐만 아니라 극단적 결핍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마냥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때로 결핍은 인간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때로 결핍은 삶을 더 열정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원이 됩니다. 부족함을 바탕으로 새로운 창조가 가능합니다.

세상의 눈,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봐서는 백 번 바라봐도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완전히 자세를 낮춰야 아주 조금 성탄의 신비가 이해됩니다. 김 서린 안경을 닦듯이 우리의 시선을 말끔히 정화시켜야 아주 조금 성탄의 신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더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야 구세주의 아름다운 별빛을 뚜렷이 목격할 수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3-12-20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29

지혜 1장 6절
지혜는 다정한 영, 그러나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는 그 말에 책임을 지게 한다. 하느님께서 그의 속생각을 다 아시고 그의 마음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며 그의 말을 다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