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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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잃은 어미 박완서, 주님을 원망했지만 주님께 위로받아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3)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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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는 벽촌의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다. 6.25 전쟁 후 가장 역할을 도맡아 하며 스스로를 불행하다 여겼다. 하지만 화가 박수근을 만나며 그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박완서 가족의 식사 모습. 사진 오른쪽이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 원태씨다.



아들 잃은 어미의 통곡

소설가 박완서(정혜 엘리사벳, 朴婉緖, 1931-2011)는 남편을 병으로 잃고 몇 개월 후에 또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었다. 박완서는 울부짖으며 통곡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참혹한 슬픔을 ‘참척(慘慽)’이라 한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슬픔이다. 참척을 당한 박완서는 하느님을 원망했다. ‘내 아들아. 이 세상에 네가 없다니 그게 정말이냐?’ 이렇게 아들을 목놓아 부르며 하느님도 너무하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아이를 데려간 것은 ‘하느님의 실수’라고 했다. 그렇게 실수한다면 하느님도 아니라고 하느님을 마구 원망했다.

그 죽은 아들은 스물다섯 살밖에 안 되었고, 튼튼한 몸과 잘생긴 얼굴을 가진 앞날이 무척이나 촉망되는 젊은 의사였다. 이토록 소중한 아들을 잃은 박완서는 ‘하느님의 장난’을 피눈물을 흘리며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 대들었다. ‘당신의 장난이 인간에겐 얼마나 무서운 운명의 손길이 된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라고 따지며 ‘당신의 거룩한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이렇게 막 가지고 장난을 쳐도 되는 겁니까?’라며 마구 대들었다.

그 아들은 최고 명문대 의과대학에서 인턴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를 선택할 때 남들이 가기를 주저하는 마취과를 선택했다. 박완서는 이를 못마땅해 왜 하필 마취과냐고 물었다. 아들은 마취과 의사는 주로 수술실에서 의식이 없는 환자들과 마주하는데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의식이 돌아오면 할 일이 없어지는 의사이며, 환자도 환자 가족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의사이므로 그 쓸쓸함에 마음이 끌려 마취과를 선택했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어질고 똑똑한 아들을 잃은 박완서는 예수님이 매달려 있는 십자고상(十字苦像)을 원망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예수님은 실컷 욕하고 원망하라는 표정 같았다. 그런데 예수님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무척 슬퍼 보이고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 후 박완서는 이해인 수녀가 있는 부산의 수녀원으로 내려갔다. 바다가 보이는 그곳에서 생활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곳에서 참척의 깊은 슬픔을 조금씩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이젠 아들이 없는 세상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박완서는 이렇게 고백했다. “주님, 저에게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완서가 자식을 잃고 쓴 글 ‘한 말씀만 하소서’는 자식을 잃은 어미의 통곡을 기록한 것이다. 박완서의 말대로 ‘통곡을 고스란히 참기가 너무 힘들어 통곡 대신 미친 듯이 끄적거린 게’ 이 글이다.



어머니의 교육열

박완서가 태어난 곳은 개성에서 조금 떨어진 개풍군 벽촌이었다. 채 스무 가구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다. 조상들이 200년에 걸쳐 대대로 살아온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의 자식 교육은 보수적이었다. 아들은 서당에 보내 한문을 배우게 하고 딸은 집에서 한글을 가르쳤다. 박완서는 그런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소학교(현재의 초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이것은 어머니의 끈질긴 고집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일찍 남편을 병으로 잃었다. 도시의 신식 병원에만 갔어도 고칠 수 있는 병이었는데 시골의 무지로 남편이 죽었다.

그래서 그 무지한 시골이 싫어 무작정 서울로 떠났다. 친척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서울 변두리에서 어려운 생활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바느질로 자식들을 키웠다. 그 후, 어머니의 뜻대로 박완서는 좋은 학교에 진학했고, 오빠는 좋은 곳에 취직됐다. 집도 버젓한 곳으로 이사했다. 어머니는 고향에서 못된 며느리 대신에 ‘잘난 며느리’로 불렸다.

박완서는 숙명여고를 나와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그해 6·25 전쟁이 나고 집안이 몰락해 어린 조카들과 노모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학교를 중퇴하고 돈 벌 자리를 찾아야 했다. 서울대 학생이었기에 남들보다 쉽게 미군 부대에 취업할 수 있었다. 미8군 PX(전문매점) 초상화부에서 일했다. PX는 지금의 서울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있었다. 그곳에는 가난한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전쟁 전에 극장 간판을 그리던 사람들이었다.



화가 박수근과 인연

그곳에서 박수근이 일하고 있었다. 박완서는 그들을 얕잡아 보고 함부로 대했다. 박완서가 하는 일은 초상화 주문을 맡아오는 일이었다.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찾아오는 미군은 없었다. 그 일이 너무 힘들어 매일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박수근이 화집을 끼고 출근했다. 박완서는 속으로 비웃었다. 박수근은 화집을 펴들고 박완서에게 왔다. 그러고는 어떤 그림을 가리키면서 자신이 그린 것이라고 했다. 촌부(村婦)가 절구질하는 모습인데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서 입선한 작품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박완서는 놀랐고, 부끄러웠고, 기뻤다. 놀란 것은 초상화 그리는 사람 중에 진짜 화가가 있다는 것이고, 부끄러운 것은 그것도 모르고 함부로 대한 것이며, 기쁜 것은 착하고 맑은 화가 한 사람을 알게 된 것이었다. 박완서는 이 일을 계기로 불행한 생각만 하며 살아오던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박완서는 결혼해 PX 생활을 청산했다. 그러나 박수근은 PX에서 계속 초상화를 그렸다. 박수근은 점차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백내장으로 고생하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박수근의 유작전(遺作展) 소식을 신문에서 보았다. 박완서는 마음을 먹고 그 전시회에 갔다. 많은 작품 중에 유독 ‘나무와 여인’이라는 작품에 사로잡혀 오랫동안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때의 감동을 소설로 쓴 것이 바로 「나목(裸木)」이다. 박완서는 「나목」으로 마흔, 불혹의 나이에 한국 문학계에 축복과 같이 등단했다. 그러곤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박완서의 대표 작품으로는 「휘청거리는 오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한 말씀만 하소서」를 들 수 있다.
 
성라자로 마을에서 박완서와 이해인 수녀.

가톨릭 장례에 감동 받다

박완서가 종교를 갖겠다고 생각한 것은 시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였다. 시어머니를 26년 넘게 모시고 살았다. 박완서가 낳은 자식은 딸 넷과 아들 하나였다. 시어머니는 그 아이들을 모두 업어 길렀다. 시어머니는 새로운 생명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고 손주들을 기르는 데도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런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종교가 없던 시어머니였기에 장례는 장의사에게 맡겼다. 박완서는 정성을 다해 시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장의사의 장례 예절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가슴이 무척이나 아팠다. 자신은 죽어서 그런 장례 의식을 치르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박완서가 본 장례 예식 중에 가장 감동적인 예식은 가톨릭 장례였다. 자신도 죽으면 저렇게 대접받고 싶었다. 가톨릭 장례 미사는 죽은 사람이 귀하건 천하건, 부자건 가난하건 구별하지 않고 극진하게 대접했다. 또한 고인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절망감보다는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감을 안겨주었다. 박완서는 가톨릭 장례 미사를 보면서 죽은 사람이 산 사람에게 ‘슬픔이 있는 기쁨’을 선물해 주는 예식이라 생각했다. 이렇듯 박완서가 가톨릭 신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가톨릭 장례 미사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성경 말씀도 너무 좋았다. 성경 말씀은 박완서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준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푸근하게 와 닿았다. 예수님이 비유하여 말씀하시는 것도 할아버지 말씀과 비슷했다. 할아버지는 무조건 혼내고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재밌는 이야기를 통해 잘못한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특히 루카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 마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착각할 정도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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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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