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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의 박경리, 하느님을 절절히 바라보다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32) 박경리 데레사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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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웃는 박경리. 박경리 유고시집에서

 

 


원주와 음악

박경리(데레사, 朴景利, 1926~2008)가 원주로 간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말렸다. 그러면서 한해를 넘기기 힘들 것이라 했다. 그런데 원주에서의 삶은 그들의 말대로 되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원주에서 살았다. 박경리가 원주에 내려온 이유 중 하나는 ‘어떠한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시간과 공간에서 남은 생애의 불길을 태워보겠다는 문학적 소망’ 때문이었다.

박경리가 고독한 싸움을 할 때 그를 위로해준 것은 음악이었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과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계속 틀어놓고 살았다. 음악을 들으며 울었고 음악을 들으며 의지를 다졌다. 박경리는 글쓰기를 일과 병행했다. “노동은 심신을 상쾌하게 해주고 또한 끝없는 생각 속으로 끌어들인다”고 했다. 글을 쓰다가 생각이 막히면 밖에 나가 풀을 뽑았다. 그러면 생각이 떠오르며 막혔던 것이 뚫렸다.

후배들이 원주에 있는 토지문학관을 찾아오면 농약을 치지 않고 키운 유기농 채소로 대접했다. 박경리는 과수와 채소에 비료·농약을 쓰지 않는 일과 쓰레기차에 쓰레기를 내다 버리지 않는 일, 이 두 가지를 원주에서 철저하게 실천했다.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스스로 밝혔다. “드럼통에 굴뚝 달린 소각 통에다 태울 것은 태우고 거름 될 것은 모두 땅에 묻고 빈 병, 깡통, 신문지 따위, 불에 타지 않는 은지(銀紙)나 자질구레한 쇠붙이 같은 것은 빈 커피통에 넣어 뚜껑을 닫고, 그렇게 해서 그런 것들이 모이면 고물 장수에게 넘겨준다.”(‘풍요의 잔해로 신음하는 대지’에서)

또한 박경리는 원주에서 시간에 구속받으며 살고 싶지 않아 시계를 착용하지 않았다. 6·25 전쟁 때 양식을 얻기 위해 시계를 풀어준 뒤로는 몸에 시계를 지녀본 적이 없었다. 서울에 있을 때 시간 약속이 있으면 사람들에게 시간을 물어보거나 라디오로 시간을 가늠했다.

 

 

 

원주 집 마당에 서 있는 박경리. 박경리 유고시집에서

 


일본에 대한 생각

박경리는 일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일본은 본래 ‘틀과 본이 없는 나라’이며 ‘틀과 본을 빌려다 연마하고 변형하고 이용하는 기능에 능한 민족’이라 했다. 일본은 자기네 나라를 신국(神國)이라 하고, 신병(神兵)과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박경리는 일본이 그 ‘사슬을 끊을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그것은 천주교가 일본에 들어온 때였다. 소위 후미에(踏繪)에 의해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을 때였다. 후미에는 손바닥 크기의 나무나 놋쇠에 예수님이나, 성모님의 모습을 새긴 것이다. 후미에는 일본 천주교 신앙의 상징이면서 천주교 박해의 상징이기도 하다. 일본 막부는 천주교인을 색출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을 모이게 해서는 후미에를 밟고 가라고 했다. 신자가 아닌 사람은 밟고 갔지만, 신자는 차마 밟지 못했다. 그런 사람들은 뜨거운 증기가 나오는 화산 온천 지옥으로 끌고 가 잔혹하게 죽였다.

이러한 후미에를 다룬 소설이 엔도 슈사쿠(遠藤周作)가 지은 「침묵」이고, 이를 영화로 만든 것이 리암 니슨 주연의 ‘사일런스’이다. 박경리는 한 일본 잡지 편집장과의 대화에서 일본을 이웃으로 둔 것은 우리 민족의 불운이라고 했다. 일본이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을 때 우리는 같은 인류로서 손잡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특별한 인연들

박경리는 현대그룹을 창업한 정주영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정 회장의 타계 소식을 들었을 때 박경리는 정 회장이 소 떼를 이끌고 분단선을 넘어가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것은 ‘멋지고 장엄한 한 편의 드라마’였으며, 세계에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 본연의 기상’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박경리는 자신을 정 회장에게 ‘신세 진 사람’이라고 했다. 현대가 설립한 문화일보에서 「토지」 5부를 연재해주었고, 현대에서 출판기념회도 후원해주었다. 또한 정 회장 부부가 원주까지 내려와 출판을 축하해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더욱 잊지 못하는 것은 프랑스에서 열리는 「토지」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가 현대 사옥에서 정 회장을 만났던 일이다. 방문 목적은 출판기념회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러 간 것이다. 인사를 하고 일어서려니까 갑자기 정 회장은 여비에 보태쓰라고 돈을 쥐여주었다. 박경리는 엉겁결에 “저도 돈 많습니다”라고 하며 받지 않았다. 그렇지만 연로한 분을 무안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지고 말았다.

이화여대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지낸 김옥길이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보았다. 박경리는 한동안 멍했다. 김옥길이 경북 문경 고사리 마을에서 병 치료하고 있을 때 찾아간 적이 있었다. 모자를 쓰고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든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간디의 모습이었다. 병이 나으면 함께 프랑스로 여행 가자고 약속도 했다. 박경리는 자신이 직접 지은 실크 윗도리를 선물로 드렸다. 찬 바람 불면 숲에 갈 때 입으라고 드린 것이다.

김옥길은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과 「토지」의 애독자였다. 그것이 인연이 되었다. 박경리는 김옥길을 20년 가까이 친정 언니처럼 의지하며 지냈다. 사위 김지하가 체포되고 딸과 딸의 갓 태어난 아기와 자신이 정릉에서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을 때, 김옥길은 아이의 옷을 한 아름 안고 찾아왔다. 아이의 기를 죽이지 말라고 하면서 서울 근교 백화점, 식당 등을 데리고 다녔다.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

박완서는 남편이 죽고 이어서 아들마저 죽었다. 그야말로 참척을 당했다. 박완서는 하느님을 부정했고, 회의했고 포악을 부렸고, 저주까지 했다. 세례받을 때 선물 받은 십자고상에 원망을 퍼부었고 내팽개치기까지 했다. 다섯 살 위였던 박경리가 박완서를 원주 집으로 불렀다. 후배를 위해 밤새 맛있는 국을 끓였다. 원주 집에 도착한 박완서와 박경리는 서로 껴안고 울었다. 선배는 후배의 등을 토닥이며 글을 써야지만 이겨낼 수 있다고 위로했다. 박완서는 선배가 끓여준 국을 맛있게 먹었다. 그러고는 다시 글을 쓰며 살아가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다.

박경리는 가톨릭신문에 한편의 글을 기고했다. 그 글을 정의채 신부가 읽었다. 정 신부는 그 글이 너무 좋아 박경리에게 만나자고 연락했다. 박경리는 정 신부와 만나 “요즘 죽음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정 신부는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 후에 정 신부에게 가톨릭 교리를 공부했다. 교리 공부를 끝마치고 ‘데레사’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박경리는 가톨릭신문에 ‘눈먼 식솔’이라는 소설을 연재했다.

박경리의 신앙은 그의 유고 시집인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의 ‘우주 만상 속의 당신’에 잘 나타나 있다. 자신의 영혼이 의지할 곳 없어 항간을 떠돌고 있을 때, 뱀처럼 배를 깔고 갈밭을 헤맬 때, 생사를 넘나드는 미친 바람 속을 질주하며 울부짖었을 때 하느님은 산간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산마루 헐벗은 바위에 앉아, 풀숲 들꽃 옆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했다. 하느님께 진작 다가가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덩쿨을 헤치고 맨발로라도 하느님 곁으로 갔어야 했다고 고백했다. 이제 머리가 백발이 되어 겨우 도착하니 하느님은 아직도 먼 곳에 계신다고 했다. 그래도 하느님을 절절히 바라본다고 했다.

“당신께서는 언제나/ 바늘구멍만큼 열어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 천수(天水)를 주시던 당신/ 삶은 참 아름다웠습니다”(박경리의 시 ‘세상을 만드신 당신께’에서)





참고자료 : ▲박경리 「토지」 20(5부 5권). 마로니에북스. 2012 ▲박경리 「우리들의 시간」 마로니에북스. 2022 ▲박경리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마로니에북스. 2008 ▲박경리 「原州通信」 지식산업사. 1985 ▲박경리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나남. 1994 ▲박경리 「생명의 아픔」 마로니에북스. 2016 ▲김형국 「박경리 이야기」 나남출판. 2022 ▲가톨릭신문(2008.5.18.) ‘토지 작가 박경리 선생 위령미사 봉헌’ ▲가톨릭평화신문(2008.5.7) 정의채 몬시뇰 “故 박경리 선생은 현대의 프란치스코 성인” ▲동아일보(2013.5.31) 김지하 “박경리 선생처럼 똑똑한 작가는 처음” ▲중앙일보(2008.5.5.) 故 박경리 선생 “시련 없었다면 「토지」도 없어”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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