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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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그리스도교미술 산책 (3) 에릭 길과 ‘신의 혼인식’

신과 인간의 완전한 사랑으로 승화된 십자가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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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릭 길.

에릭 길(Eric Gill, 1882~1940)은 영국 개신교 교파의 가정에서 태어나 가톨릭으로 개종한 작가다. 이후 디츨링에 ‘성 요셉과 성 도미니크 장인 길드’를 세웠으며 가정을 이루었지만 평생 도미니크회 재속회원으로 살면서 가톨릭 교리와 신앙에 바탕을 둔 작품을 다수 제작했다. 대표작으로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Westminster Cathedral) ‘십자가의 길’, 스위스 제네바 유엔본부에 ‘인간의 재창조’ 등을 조각했고 길 산스(Gill Sans)체 외에 다수의 활자체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번 호에서는 그의 작품 중 ‘신의 혼인식’을 만나보자.

그리스도가 혼인하는 것은 가능할까? 십자가 처형 중에 왜 막달라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포옹하는가?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는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에릭 길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이미지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신의 혼인식’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그를 온 몸으로 포옹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판화로 제작한 것이다. 예수의 고통과 죽음의 과정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보여준 열렬한 믿음은 예술의 영역에서 대중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금발의 긴 머리를 풀어 놓은 채 신성한 성모와 구별되는 붉은 옷을 입고 십자가 아래에서 슬픔에 복받쳐 오열하는 이미지로 묘사되곤 했다. 막달라 마리아를 죄지은 여인으로 인식하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끊임없이 종교미술의 재현대상이 되었던 것은 그녀가 회개하고 예수를 따랐던 열렬한 신앙인의 모델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종 막달라 마리아는 낭만적인 조각과 회화 속에서 예수의 연인으로 묘사되었다. 심지어 오늘날 무신론자 혹은 비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녀를 열성적인 예수의 여제자라기보다는 「다빈치 코드」와 같은 추리소설을 통해 흥미 있는 스캔들 소재로 재현해 내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에릭 길은 ‘신의 결혼식’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전통적 코드로서 묘사하지 않고 성애적인 질감이 느껴지는 인물로 형상화하고 있다. 간결하게 구성된 선들은 그녀가 십자가에 책형 당한 예수에게 입 맞추며 알몸으로 그를 감싸 안았음을 연상하게 해 준다. 한껏 연인과의 관계를 환기시키는 이러한 변형된 종교적 이미지는 아무리 시대의 풍조가 변했다고 해도 가히 파격적이지 않은가!
 

 
▲ 신의 혼인식 Nuptials of God, 1922, 도미니크 출판사의 「게임Game」지에 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전형적인 종교적 이미지로 사용된 작품이다. 에릭 길은 이 작품을 영국 도미니코 수도회 사제 제럴드 반(Gerald Vann)의 서품식 카드로 제작했다.

그렇다면 에릭 길은 사제를 막달라 마리아로 비유한 것일까? 그의 의도를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그가 사제 서품식을 육체와 정신의 합일이 이루어지는 혼인식에 비유한 것만은 분명하다. 실제 에릭 길은 가정을 이룬 평신도였지만 신비주의 영성가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신과 인간의 일치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생각들은 다분히 사제 서품식을 신인 그리스도와 인간인 막달라 마리아의 합일로 이미지화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한편 주목할 만한 것은 에릭 길이 사랑의 일치를 위해 둘을 온전히 하나 된 형상으로 묘사하고 신의 남성적 이미지와 막달라 마리아의 여성적 이미지를 구태여 재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랑의 일치를 위해 그들에게는 자아 상실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이 작품은 십자가 고통의 순간을 완전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으로 중첩시켜 놓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스스로 희생된 이유를 사랑에서 찾고 있다.

에릭 길이 세속적 사랑을 환기시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혼인의 영적인 친교를 보여 주려고 했다면 이 미스터리한 반전의 열쇠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인가? 그녀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고 예수의 텅 빈 무덤을 보았으며 부활한 예수를 처음 목격한 여자였다. 작품은 신과 혼인한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완전한 사랑이 고통을 기꺼이 나눌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 최정선(숙명여대 출강)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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