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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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에 취하다] (4) 엔도 슈사쿠의 「침묵」

불러도 대답없는 주님, 눈물 흘리고 계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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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성(가브리엘) 시인이 우리말로 옮겨 바오로딸에서 출간한 엔도 슈사쿠의 「침묵」 한국판.
 

▲ 정길연(베트라, 소설가)


   정길연(베트라, 소설가)

   고백하면, 나는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종교를 물으면 나는 종교주의자가 아닙니다, 라고 대꾸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지구상에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그 어떤)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모든 독선과 야만, 종교가 야기한 모든 갈등과 적대감에 대체로 아전인수하는 종교인들의 모습에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현대 종교가 외적 성장에 치우쳐 지나치게 화려해지고 타성적이 돼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교회에 나가던 동안 나는 제자리걸음이었다. 내 믿음을 믿지 못했다. 순정하지 않았고, 다분히 기계적이었다. 습관적 출석과 입에 밴 기도문 암송으로 외형상 착실하게 종교적 행위를 했을 뿐이었다. 물론 내 영혼이 허약한 탓이었다.

 다시 조심스럽게 고백하면, 교회에 나가지 않는 동안 나는 오히려 더 꾸준히, 더 집중적으로 성경을 읽었다.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이는 듯했다. 회의하고 투정하고 고꾸라지고 일어나면서, 말씀 안에 모든 대답이 다 들어 있음을 조금씩 깨달아갔다. 여전히 교회에 나가지는 않으면서, 비록 종교주의자는 아니지만 믿음은 가지고 있다고, 하느님은 존재한다고 떠듬거릴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완전한 승복은 아니었다. 나는 아직 내 믿음에 대해 내놓고 말하기가 불편하다. 지구촌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악몽 같은 현실을 떠올리면 더더욱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총칼을 앞세운 군인들에 의해 제 땅 제 집에서 쫓겨나는 난민들, 핍박받는 하층민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맨발로 쓰레기더미를 뒤져야 하는 어린아이들……. 이 불공평하고 절망적인 세계를 납득할 수 없어서다.

 하느님의 손이 절대적으로 절실한 이 순간에도 어떻게 아무런 메시지가 없을 수 있는가? 도대체 왜 이런 세상을 내버려 두시는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다시 찾아 읽게 된 것도 어쩌면 그 질문과 새롭게 맞닥뜨리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엔도 슈사쿠의 1966년 작 소설 「침묵」은 17세기 일본 규슈 나가사키 지방의 가톨릭 박해 상황을 배경으로, 배교를 강요당하는 포르투칼 신부 페레이라와 로돌리코의 내밀한 고뇌와 번민을 다룬 소설이다.

 스승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소문을 확인하고자 일본으로 밀항한 로돌리코 신부 일행은 교활하고 비굴한 인물 기치지로와 피할 수 없는 악연으로 얽힌다. 동료 신부 가르페가 순교한 뒤,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기듯이 기치지로 또한 로돌리코를 팔아넘기지만, 그러면서도 끝까지 그의 주변을 맴돌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던 로돌리코를 후미에(성화판을 발로 밟음으로써 배교를 증명하는 행위)로 이끈 건 옥사 너머로 들려오던 코 고는 소리의 진실이었다.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 직전에 들었던 소리이기도 했다.

 `"나도 저 소리를 들었다.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말이다."

 그 말이 그치자 다시금 코 고는 소리가 높게 낮게 귀에 들려 왔다. 아니, 그것은 이미 코 고는 소리가 아니고,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들의 지쳐 떨어진 숨이 끊길 듯 끊길 듯한 신음소리라는 것이 신부에게도 지금은 뚜렷이 느껴졌다`(195쪽).

 결국 로돌리코 신부 또한 `자기 생애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 온 것, 가장 성스럽다고 여겨 온 것, 인간의 가장 높은 이상과 꿈으로 가득 차 있는` 성화판에 발을 올리고 만다.

 `발에 둔중한 아픔을 느꼈다.(……) 이 발의 아픔. 이때 밟아도 좋다고 목판 속의 그분은 신부를 향해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은 바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나눠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다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먼 곳에서 울었다`(201쪽).

 소설은 배교자 바오로, 오카다 산우에몬이 된 로돌리코가 고백성사를 애원하는 기치지로의 청을 들어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경멸하고 저주했던 기치지로야말로 나약한 인간의 표상이며, 그조차 용서하고 품는 것이 예수의 사랑임을 깨달으면서.

 `성직자들은 이 모독적인 행위를 몹시 책할 테지만, 나는 그들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226-227쪽).

 교회법으로 보자면, 페레이라와 로돌리코의 후미에는 배교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 종교적 불명예는 예수 사랑이라는 통찰에서 행해진 것이다. 그것은 처절하고도 숭고한 자기희생, 또 다른 의미의 순교다. 스스로 아름답고 자랑스럽고자 하는 순교는 종교적 명예심에 붙들린 제스처에 불과하다.



 
▲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성화 `후미에(ふみえ, 踏み繪)`. 에도(江戶) 막부는 1628~1858년 해마다 나가



가톨릭평화신문  2009-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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