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어제는 가톨릭교회가 정한 홍보주일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기도서와 신심서적 등은 박해 시기 신앙 선조들의 선교 열정과 희생으로 전해질 수 있었는데요.
103위 순교성인 중 한 명인 최형 베드로 성인의 행적을 통해 홍보주일의 의미를 다시금 새겼으면 합니다.
윤재선 기잡니다.
[기자] 한글로 쓰인 「천주성교공과」입니다.
가톨릭 기도서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천주성교공과」는 1972년 「가톨릭 기도서」가 출간되기까지 100년 넘게 사용됐습니다.
한글본 「성찰기략」은 성찰과 묵상을 통해 고해성사를 준비하도록 이끄는 일종의 안내서입니다.
두 서적 모두 1864년부터 65년 사이에 목판으로 간행됐습니다.
이는 엄혹했던 박해 시기, 목판 인쇄소를 차려 수많은 교회서적 간행을 통해 신심 확산에 힘쓴 신자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주인공은 103위 순교성인 중 한 명인 최형 베드로입니다.
성인은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서 사제 수업을 받다 병사한 신학생,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형이기도 합니다.
또한 1845년 중국 상해에서 거행된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식에 함께한 조선 교우 11명 중 한 명입니다.
<조한건 신부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서품식을 지켜보면서 동생 생각이 얼마나 떠올랐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그 이후로 최형 베드로는 20년을 순교할 때까지 온 힘을 다해서, 어떻게 보면 동생이 하지 못한 몫을 다 해낸…"
성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선교사인 성 모방 신부를 비롯한 여러 사제들의 복사로 활동하며 신앙심을 키웠습니다.
<조한건 신부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그때(복사 시절)부터 기도를 외우고 또 선교사들을 잃었을 때 선교사 없이 하는 첨례경, 오늘날 공소예절과 같은 그 기도문들을 다 외우고 있었겠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무에 새기면서, 마음에 새기면서 기도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틈틈이 신심서적을 번역하기도 했던 성인은 신자들이 사제를 만나기조차 어려운 박해 시기였기에 서적을 통한 전교에 더욱 힘을 쏟았습니다.
1866년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면서 많은 교회서적들이 발각되자 최형 베드로 성인은 포도청으로 끌려가 혹독한 심문을 받습니다.
배교를 강요당하지만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꿋꿋이 지킵니다.
이는 당시 추국기록에 담긴 문답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1866년 3월 9일, 성인은 53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됩니다.
<조한건 신부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최형 베드로 성인의 또 순교자의 열정들이, 나무에 새긴 열정들이 또 우리 신자들의 가슴에 새겨졌으면 어떨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성인의 유해는 43년 간 서울 왜고개 성지에 묻혀 있다 지금은 절두산 성지에 모셔져 있습니다.
CPBC 윤재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