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하기박물관이 서한 3통 공개 생이별한 남동생에 대한 심경 담겨 줄리아의 출신 배경·나이 등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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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세례를 받고 믿음 굳건한 신앙인으로 활동했던 조선인 ‘오타 줄리아’(율리아)의 친필 편지가 최초로 공개됐다. 본지가 옛 일본어로 쓰인 편지 사진과 현대어 번역본을 입수했다.
최근 일본 야마구치현 소재 하기박물관이 첫 공개한 오타 줄리아의 서한은 총 3통으로, 한국과 일본 양국 교회 사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편지는 오타 줄리아의 남동생 후손이 박물관 측에 기증하면서 대중에 처음 공개된 것으로, 그간 양국 학계가 매진해온 오타 줄리아 관련 연구와, 여전히 명확한 기록이 없는 그녀의 삶을 고증할 귀한 자료로 쓰일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제 남동생은 손에 푸른 멍이, 발에는 적갈색 멍이 있습니다. 당신도 같은 부위에 멍이 있나요? 부디 대답해 주세요…. 우리 형제 중 당신만은 부모님과 함께 피신했을 거로 생각했는데, 저와 마찬가지로 이 나라에 끌려와 있을 줄이야….”
본지가 입수한 친필 서한을 보면, 포로로 끌려간 뒤 생이별한 남동생을 찾는 누이의 절절한 심경이 담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609년 8월 19일 하기에서 하층민으로 살던 남동생(일본 이름 무라타 야스마사)에게 보낸 첫 편지 내용이다. 이번 친필 서한 공개로 그간 추측만 무성했던 오타 줄리아의 이름과 출신 배경들도 일부 확인됐다. 한때 학계에선 줄리아가 왕족 가문인 전주 이씨라는 설이 많았지만, 그는 편지에서 “한성(서울)에서 ‘제운대군절도사(濟運大君節度使)’로 불린 왕의 측근 김세왕온(金世王)과 부인 홍씨 사이 5자녀 중 장녀”라며 김씨 양반가 출신임을 밝히고 있다. 국내 사료에는 ‘제운대군절도사’와 ‘김세왕온’이란 이름을 찾아볼 수 없어 교차 검증이 필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줄리아는 또 자신을 ‘타아(たあ)’라고 밝히면서, 임진년(1592년) 당시 13살이었다고 언급한다. 기존에 알려진 ‘오타’의 ‘오’는 귀부인에게 쓰던 존칭 ‘오(御)’였던 것이다. 일본명은 오타가 아닌, ‘타아’가 맞는 셈이다. 그녀의 정확한 이름은 밝혀진 적이 없다. 줄리아, 혹은 쥬리아는 세례명 율리아의 일본식 발음이다.
줄리아는 또 수신자를 본인과 7살 터울인 둘째 남동생 ‘운나키(うんなき)’로 지칭하고 있다. 정황상 ‘타아’와 ‘운나키’는 조선에서부터 쓰던 이름일 가능성도 엿보인다. 특히 ‘운나키’는 ‘운락(운낙)’이나 ‘운악’·‘운학’ 등을 칭하는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아울러 줄리아는 편지에서 자신이 “1593년 한성에서 또 다른 11살짜리 동생, 몸종과 함께 붙잡혔다”고 썼다. 일본으로 끌려간 그는 조선 침공 선봉장이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아우구스티노)의 시녀로 살았고, 1596년 예수회 모레혼 신부에게 ‘율리아’로 세례받았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겨졌다.
그러다 야마구치 일대의 모리 가문 휘하에 자신의 남동생과 닮은 조선인 포로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편지에는 “당신이 머무는 가문의 사람이 고려(조선)에 있을 적 당신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제 남동생이 맞는다고 생각했다”며 “일본에 와있으리라 생각 못 해 그동안 찾지 않았다. 제 동생이 맞는다면 20일 정도 여유를 갖고 슨푸성(이에야스의 거처)으로 와달라”고 다급히 요청하는 대목도 등장한다. 이후 일본에서 신자로 활동하다 유배를 당하면서도 배교를 거부했던 줄리아는 나가사키 등지에서 여자 어린이들에게 교리와 성가를 가르치고, 가난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복음 전파에 힘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그리스도교 사학자 아사미 마사카즈(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교수는 본지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그간 오타 줄리아에 대한 기록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사료에 단편적으로 나온 게 전부였다”며 “친필 편지는 그의 입을 통해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는 무척 귀한 사료”라고 평가했다. 이어 “줄리아가 고귀한 신분 출신이란 것이 사실로 밝혀졌으며, 그가 전쟁으로 헤어진 친동생을 실제로 만난 경위도 판명됐다”고 전했다.
한국어로 서한을 번역한 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이세훈(토마스 아퀴나스) 박사는 “품위 있는 양반 출신으로 한자와 일본어를 두루 터득한 줄리아의 친필 편지가 그녀의 말년을 푸는 실마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일본에서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조선인 순교자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더욱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줄리아의 친필 서한은 일본 하기박물관에서 18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