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북한이탈청소년들이 이용하는 시설이 아닌, 아이들이 살아가는 집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고, 학원도 가고, 친구들도 데려와 같이 노는 집. 누워서 하는 일 없이 뒹굴거리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그런 집입니다. 저는 이 집에서 15명을 독립시켰고, 현재는 10명과 같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25명 모두 제게 소중한 아이들이지만, 특히나 아픈 손가락이 하나 있습니다.
진범이는 14살에 탈북해 한국으로 넘어와 바로 우리 가족이 된 아이입니다. 14살이라고 하기엔 너무 무르고 연약해 보여 초등학교 3학년이라 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었습니다. 진범이는 북한에서 어린 나이에 가정이 무너져 혼자 살아가기 위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끼니를 해결했다고 합니다. 하루하루 어렵게 살다 넘어온 진범이는 학교에 다닌 적도,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어서 한국에 와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날, 진범이의 긴장된 얼굴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학교생활은 진범이에게 가장 행복한 기억 중 하나입니다. 북한에서부터 학교에 가고 싶어 학교 담 밖에 있는 나무 위에 올라가 구경했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며 누구보다 학교를 사랑했던 아이입니다. 시간이 흘러 진범이는 중학교 3학년이 됐고,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14살에 한글을 배우고 처음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진범이가 북한이탈청소년으로는 최초로, 일반 학교에서 학생들의 직접 투표로 전교학생회장에 선출된 것입니다.
“저는 엄마 아빠도 없고, 북한이 고향이고, 공부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사랑하는 학교를 위해 봉사하고 싶어 학생회장에 출마하게 됐습니다. 저와 같은 배경을 가진 학생도 학생회장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습니다.”(회장 후보자 연설문 중)
너무나 가치 있는 경험을 얻고, 주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준 진범이는 올해 28살이 됐습니다. 현재는 대학을 포기하고, 철원으로 내려와 철원평야 너머 북한이 바라보이는 최북단카페 ‘오픈더문’에서 일하며 농작물을 재배합니다.
해가 채 뜨지도 않은 새벽, 농작물 관리를 위해 손전등을 들고 밭으로 향하는 진범이를 도우러 저도 따라나선 적이 있습니다. 어두운 새벽 밭일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제게는 조금은 무섭고 힘든 일이었지만, 이날만큼은 진범이를 꼭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겁먹고 긴장하며 따라나서는 저의 서툰 모습을 본 진범이가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삼촌, 내가 어릴 때 배가 고파서 산에 약초 캐러 들어갔는데,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약초를 캐다 보니 금세 어두워진 거야! 길도 못 찾고 추워져서 본능적으로 따뜻한 곳을 찾아 그곳에서 그냥 잠이 들었어. 그리고 일어나 보니 내가 묘지에서 자고 있더라. 묘지는 낮에 해를 많이 받아 땅이 따뜻해!”
‘부스럭’ 소리에도 겁먹는 제가 한심해 보였을까요. 저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왔지만, 진범이의 얼굴 그 어디에서도 그늘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나 귀한 아이가 제 품으로 와 지금까지도 큰 울림과 깨달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진범이의 꿈을 언제나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사)우리들의성장이야기 대표 ‘총각엄마’ 김태훈(제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