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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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사] 주교단대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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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의 긴 겨울을 보내고 이제 온갖 초목이 연둣빛으로 새 옷을 갈아입는 계절, 형형색색의 봄꽃들이 그윽한 향기와 함께 그 자태를 뽐내는 계절의 여왕이라 일컫는 5성모님의 달첫날에, 우리는 한국 천주교회의 큰 어른이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을 주님께 보내 드리는 슬프고 허전하기 그지없는 이승에서의 작별 순간을 맞고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 1코린 9,22)이라는 당신의 사목 표어에 따라 다른 이들을 위해 전 생애를 봉헌하신 추기경님을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하는 시간입니다.

 

추기경께서는 19613월 사제품을 받으시고 주님 품으로 가시기까지 꼭 601개월 21,956일을, 197010월 주교품을 받으시고 507개월 18,470일을 오롯한 마음으로 주님과 성 교회에 봉헌하셨습니다. 이렇게 추기경님은 1931년 태어나신 후 이 순간까지 하느님 섭리에 따라 32,605일의 대장정 마라톤을 앞만 보고 뛰어 완주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휴식과 여가, 취미와 여행, 건강과 더 나은 안락을 추구합니다. 이런 것과 너무 거리가 먼 추기경께서는 사목 활동을 제외하고는 충분한 휴식과 취미 생활조차 마다하시고, 작은 거실과 서재를 우주 삼아 오가시며 오직 교회와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서 기도와 묵상, 독서와 집필에만 몰두하셨습니다. 따분하게 보이는 이런 일상을 무엇과도 견주거나 바꿀 수 없는 행복과 기쁨으로 여기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렇게 들리는 듯합니다. “잘 하였습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이여! 와서 당신의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시오”(마태 25,23 참조).

 

추기경께서는 청주교구장으로 28,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로 14, 42년간 주교 직무에 몸 바치셨습니다. 청주교구에서는 본당 자립과 사제 양성, 가난한 이를 위한 사회 사목 등에 온 힘을 기울이시며 교구 자립과 사목 체계 확립에 이바지하셨고, 서울대교구장 재임 중에는 통일 시대를 대비한 의정부교구를 분할하셨고, 친교의 교회상 정립을 위한 4년간의 시노드 개최, 지역장 대리구제, 공동 사목 실천, 복음화율 20 신자 배가 2020 운동, 생명 존중과 나눔 운동 등에 힘쓰셨습니다.

 

추기경께서는 바쁘신 중에도 교회법 해설서를 비롯한 저서 51, 번역서 14, 전집 등 65권에 달하는 책을 펴내시는 초인간적 투혼을 발휘하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라틴어로 쓰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가경자 최양업 신부님의 서한을 번역하시며, 두 분의 성덕을 알리는 데에도 주력하셨습니다. 이 서한들을 번역하시면서 땀에 젖은 팔뚝에 원고지가 붙어 다니는 삼복더위를 무릅쓰고, 번역을 강행하여 말복 날 끝내셨다고 술회하고 계십니다. 조선 남부 5개도에 산재되어 있는 127개 교우촌 신자들을 매년 7천 리 길을 걸어서 12년간 사목하시다가 과로로 탈진하여 마흔 나이에 병사하신 땀의 증거자이셨던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시복을 위해, 추기경님께서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염원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올해가 바로 이미 아시는바와 같이 최양업 신부님의 탄신 200주년의 해이기에 올해에는 시복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단 하루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한평생을 하루처럼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시어 독서와 저술에 전념하셨고, 이 작업은 주님께 가시기 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서울대교구장직을 내려놓으신 후에도 매년 126일 니콜라오 축일에는 영적 보물이 담긴 신간을 어김없이 선보이셨습니다. “저는 그저 매일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 안에서 살았기에 너무 행복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을 믿고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신앙을 갖고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의 길입니다.” 추기경님의 이 말씀들은 나태한 습성에 젖은 우리에게 강한 울림과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이는 추기경님께서 깊은 성체 신심, 순교 영성 속에 사시면서 얼마나 시간을 소중하고 알뜰하게 활용하셨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추기경님의 온화하신 성품과 따뜻한 마음, 평소에 보여 주셨던 검소함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추기경님을 보내 드리는 우리는 든든한 버팀목과 무성한 잎이 달린 큰 나무 그늘을 빼앗긴 상실감을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자애로우신 아버지이셨고 착한 목자로 우리 곁에 계셨습니다.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켜지 않고, 바지 한 벌을 18년 동안 입을 정도로 청빈한 삶을 영위하셨으며, 누가 식사 초대를 해도 혹여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이 소외감을 느낄까 봐 일절 초대에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천국으로 거처를 옮기시는 추기경님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착한 목자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 주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우리는 추기경님께서 일생 한국 천주교회에 베풀어 주신 큰 사랑과 영적 보화를 남겨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지상에 남아 있는 우리는 오래오래 추기경님을 생각하며 매우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슬프고 못내 아쉽습니다. 많은 이들이 코로나19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 격량의 어려운 시기에 우리 모두 추기경님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을 실천할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십자가를 모두 내려놓고 주님 품 안에 드신 사랑하올 정 추기경님! 우리나라 국민을 위한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로 한국 사회를 비추어 주시고, 이 땅의 모든 이가 행복과 보람을 느끼며 살도록 성모님께 기도하여 주십시오. 무겁고 혹독하게 짓누르던 육신의 고통과 아픔 없는 하느님 나라에서 거행되는 천상 전례에 참여하시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십시오.

 

한국의 순교 성인들과 복자들이여, 오소서.

주님의 천사들이여, 마주 오소서.

이 영혼을 받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앞에 바치소서.

아멘.

 

 

202151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

 

 



서울대교구홍보위원회 2021-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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