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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칼럼] (135)특별 군사 작전과 평화/ 윌리엄 그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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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014년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국경 지역 도발을 시작으로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푸틴이 바라는 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러시아는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고 러시아의 가스와 석유에 기대고 있는 나라들이 그저 손을 떨며 지켜보기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전쟁은 곧 끝나고 지정학적 재배치가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할 만했다.

우크라이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물질적, 윤리적 지원에 힘입어 기대 이상으로 집요하게 러시아에 대항하고 있다. 푸틴이 이 ‘특별 군사 작전’을 일으킨 주요 목적 중 하나는 러시아 국경을 둘러싼 NATO의 세 확장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과거 NATO 회원국이 아닌 두 개 나라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대응으로 NATO에 가입을 신청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NATO 회원국 증가와 국제사회 제재로 인한 러시아 경제 침체, 한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러시아 군대의 무기력, 심지어 모스크바를 향한 드론 공격, 러시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전운동 등으로 푸틴은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역효과를 경험하고 있다.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불거진 문제는 군사와 경제, 정치적인 것뿐만이 아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상황에 응답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 수장인 모스크바의 키릴 총대주교가 전형적인 예다. 그는 푸틴과 이번 전쟁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그는 ‘승리’를 위해 기도를 요청했다. 그는 푸틴의 독재를 “하느님의 기적”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반대편에는 ‘우크라이나 평화 연합’(Peace in Ukraine Coalition)이라는 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지난 6월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한 국제 정상회담’을 조직했고, 오는 9월 30일부터 10월 8일까지 즉각적인 휴전과 협상을 촉구하는 ‘국제 운동 주간’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 단체는 홈페이지를 통해 “6개 대륙 32개 나라에서 330명 이상이 6월에 열린 ‘정상회담’에 참가했다”고 자랑하지만, 이 ‘정상회담’에는 극소수만이 참가했다. 슬픈 일이지만 폭력이 평화보다 더 큰 반응을 얻는다는 것이 진실이다.

이 단체를 포함한 다른 평화 운동 단체들이 어떻게 공동의 휴전이나 협상을 이끌 것인가? 한쪽이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한다면 분명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한다. 또한 이들은 평화의 전제 조건인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실질적인 계획을 마련하고 있을까?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대표적인 나라인 미국의 주교회의는 이번 전쟁과 관련해 어떤 성명도 내지 않았다. 전쟁에 대해 발언을 해봤자 무시당할 것이 뻔하니 침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마도 더 좋은 전략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이 상황을 인식하고 최소한 찬반 의견을 드러내는 조치라도 실시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특사를 임명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하나로 모으라는 비현실적인 임무를 부여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어떤 가시적인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 평화 운동은 러시아의 불의한 공격에 대한 보상 없이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응답을 내놓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평화 운동과 국가와 민족 간 폭력 종식을 위한 노력을 때려치워야 할 때임을 보여주는 것일까? 이 꿈은 이상주의자들에게나 알맞은 비현실적인 것일까?

비폭력과 서로를 존중하는 사랑이 하느님의 뜻임을 확신하면서도 1940년대 나치 정부에 무력으로 대항함으로써 당시의 유럽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다.

세상에는 평화를 염원하는 평화주의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나는 평화주의자는 아니다. 사람들은 분쟁을 막고 줄이며 없애기 위한 또 다른 비전과 실질적인 계획을 내세우면서도 너무 쉽게 폭력에 의지한다.

활동적이며 헌신적인 평화주의자들은 우리가 폭력에 의지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상황을 바꿀 또 다른, 혹은 더 나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말이다. 폭력을 피하기 위한 시도들이 무산된다면 평화주의는 우리가 회개하고 폭력을 넘어선 적절한 다른 방법을 찾도록 이끈다. 그리고 분쟁이 끝나고 나면 미래에 또 다른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는 억울함을 넘어 새로운 평화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돕는다.

평화주의는 이상일 뿐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 이러한 이상이 필요하다.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 외방전교회 사제로서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주교회의가 발행하는 주간 가톨릭신문 편집주간을 지내기도 했다. 현재는 아시아가톨릭뉴스(UCAN) 발행인으로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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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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